급진적 정치
1990년대 초, 소련 체제의 붕괴와 옛 지도에 그려진 대로 국가들의 분열이 일어난 것을 두고,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우리가 목격한 것이 ‘역사의 종말’이라고 선언했다. 위대한 이념적 전투는 끝이 났고, 오로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경제를 어떻게 성장시킬지에 대한 지루한 기술적인 질문뿐이었다. 이 선언은 성급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현재로 빠르게 돌아와 보면, 우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에서, 독재정치의 부활과 서구 국가들이 주권과 ‘자유세계’의 다른 이상을 방어하기 위한 분주한 움직임을 목격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정렬이 재조정되고 있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오래된 이념적인 노선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문명의 경계를 따라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는 새롭게 깨어난 자기 정체성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국가들의 정당성의 한 형태가 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거대한 경제력뿐만 아니라, 중화사상과 서구 국가들의 힘에 의한 수치스러운 한 세기의 역사를 지우려는 열망에 의해서도 촉진되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의 권력 구도에 비추어 봤을 때, 더 작은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은 독재적 통치에 대한 비판과 강대국들의 내정 간섭 압력에 맞서서 ‘아시아적 가치’를 논한다. 민주화에 대한 반발은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식민지 영향에서 파생되거나 종교의 제재를 받는 체계적인 정치 행동 패턴으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환멸 때문이기도 하다. 1990년대에 태동된 세계의 이 사회-정치적 궤적은 급진적 정치의 새로운 물결을 촉발시켰다.
급진적 정치의 현재와 잠재적 미래
기존 권력 체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기반한 급진적 정치는 변혁적 행동을 추구하고,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미래를 구상한다. 급진주의자들의 주요 요구 중 하나는 착취적이며 성장-지향적인 경제 구조의 재평가인데, 이것은 위기의 원인이면서 그것을 영속화하는 엔진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요구 뒤에 있는 대담함과 용기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것은 중요하다.1 한편, 전통적인 정치 기관에 대해 자라나는 환멸은 대안적인 접근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급진적 운동의 출현을 촉발할 수 있다. 반면에, 양극화, 사회적 분열, 그리고 포퓰리즘의 부상은 급진적 정치의 영향력과 효과성에 도전을 줄 수 있다. 그것의 비판과 비전은 지정학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에 의해 형성된다. 급진적 운동의 잠재력과 그것에 의해 직면한 장애물을 인식하는 것은 그들의 영향에 대한 더 섬세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2
‘급진주의(radicalism)’라는 용어는 ‘극단주의(extremism)’라는 용어보다 더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록 최근에는 급진주의가 다양한 좌파 정치 이념과 연관되어 있지만, 그것은 다양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의 광범위한 역사적 맥락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적 진보의 이상과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3
종교적 급진주의에 관해서는, 흔히 폭력, 광신주의(fanaticism), 그리고 가부장제의 영구화로 특징 지어지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좌파적 종교 형태의 정치가 등장했다. 여기에는 토착적 관습, 억압적인 정권에 대항하는 평화로운 캠페인, 그리고 삶의 대안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 소외된 개인들이 포함된다.4 정치 담론의 관점을 넓힘으로써, 종교에 대한 서구적인 경향에 도전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종교와 급진적 정치의 교차점에 대해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5
최근 몇 년 동안, 성별, 인종, 계급, 출신 국가, 그리고 환경과 관련된 이슈들이 정체성 정치학(identity politics)의 영역 내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다.6 이러한 사회적 관심의 변화는, 급진주의가 윤리적 문제를 권력의 문제로 축소하고 피해자 상태(victimhood)를 도덕적 우월성과 동일시하면서, 경제와 계급 문제를 그 대가로 치르게 되었다.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면서, 도덕적 지침으로 이념에만 의존하는 것은 비판적이고 검열적인 태도로 비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정의가 어떤 사회적 형태 속에서 추구되든지 그 불완전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7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이러한 어떤 이상주의(idealism)도 반대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위에서 언급한 맥락에서, 급진적 정치는 심층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대답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분열을 초래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이상주의(idealism)에서 그 자체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더욱이, 급진적 정치는 정당한 권위와 부패한 권력의 사용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인정하는 데 실패한다.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에코 챔버(echo chambers)와 필터 버블(filter bubbles)에 의해 제기되는 도전은 양극화와 보복심을 강화시킨다. 이 현상의 아이러니는 대체로 좌파 성향을 가지고 있는 소셜 미디어 회사들이 이러한 문제를 증폭시키는 동시에 소유주와 주주들에게 엄청난 재정적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를 두고 보면, 급진적 정치가 역사적으로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 억압적인 체제에 맞서는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톰 홀랜드(Tom Holland)의 평가는 냉정하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독교적 영향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페미니즘은 비기독교적 환경에서는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8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계급 없는 사회를 기독교 종말론의 무신론적 성취로 보고, 따라서 마르크스를 기독교 이단의 긴 목록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신론 철학자 존 그레이(John Gray)는 자유주의 무신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것은 인본주의의 진보가 ‘유대교와 기독교 종교의 늦은 꽃이고, 과거에는 대부분의 무신론자가 자유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믿는 것이다.9
다음으로 우리는 급진적 정치와 관련된 두 그룹의 질문을 다룰 것이다. 우리의 답변은 남아시아와 중동에서의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특별히 팔레스타인에서의 급진적인 정치 원칙의 기독교적 표현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급진적 정치와 대위임령
앞서 언급된 기독교 세계관의 독특한 특징들을 염두에 두고, 특정한 사회적, 인류학적, 그리고 정치적 현상들이 비기독교적 환경에서는 나타날 수 없었을 때 바로 이러한 동일한 현상들이 기독교 구조 내에서 권력 남용을 다루고 시정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역설(paradox)’은 깊은 성경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특히 예언서들은 우리에게 우상숭배, 즉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명목상의 인정과 그것의 실제적인 남용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계속 경고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러한 불일치는 심지어 기독교화된 문화에서조차 존재하는 운영 가치들과 거버넌스의 확립된 구조 사이에서 일치의 부족을 통해 나타난다. 과테말라의 사회학자 베르나르도 아레발로(Bernardo Arevalo)가 말했듯이, ‘우리는 하드웨어로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지만, 소프트웨어로 권위주의를 가지고 있다.’ 유럽 식민지였었던 곳에는, 카우디요(caudillo, 강력한 지도자)의 숭배, 신화적인 강한 남자의 신화가 지속되어, 가부장제의 주요 특징이 영속화되고 있다. 급진적 정치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헌팅턴(Huntington)이 예견한 ‘문명의 충돌’이 증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이슬람과 같은 정치적인 종교의 부상 전에만 해도 눈에 띄지 않았고, 더 작은 규모에서는 미국의 종교적 우파가 현재 미국을 양극화시킨, 세속적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문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실패한 국가들 안에서의 분쟁으로 인한 수백만 명의 난민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이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호스트 문화의 시민과 이주민의 인권 사이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 이동에서 지역을 넘어 교회, 모스크, 그리고 사원이 등장했다. 그들은 단지 종교 공동체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동포들을 위한 사회적 중심지의 역할도 한다. 그들은 또한 ‘크리스텐덤’의 오래된 개념에 기반하여 자아-정체성을 구축한 국가들에게 도전을 제기한다.10
열방의 제자화
이제 우리는 다양한 문화와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위임령을 수행해야 하는가?
우선, 우리는 대위임령이 단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열방을 제자화하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 발전된 신학의 영향을 받은 우리 중 많은 이는 흔히 마태복음 28장과 성경의 많은 다른 부분을 개인주의적으로 읽으면서 우리 증거의 공동체 성격을 간과해왔다.
‘열방을 제자화’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사회의 공동생활을 조직하는 구조와 기관들, 즉 삶의 체계에 참여하여 이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대한 선교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는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헬라 사상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성경이 어떻게 문화에 관여하고 국가의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말씀은 모든 특유의 사고방식, 친족 관계의 네트워크, 그리고 국가에게 공통성, 일관성, 정체성을 주는 특별한 방식들로 전달되어야 한다. [말씀]은 공동체의 공유된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과정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11
여기서 우리가 논하는 것은 기독교 민족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해석학적 공동체’를 양육하는 것인데, 이들은 잇사갈 지파와 같이, 시대를 분별하고 공동체에 말씀이 어떻게 해답을 제시하거나 혹은 적어도 공적 영역의 많은 복잡한 문제에 빛을 비출 수 있는지 안내할 수 있다.
바울에 따르면, 증인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함’(고후 10:5)을 요구한다.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사회의 사고방식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세속화로 이어졌다.12 이러한 실패는 기독교만큼 철학적이고 종합적인 종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시아 문화가 복음에 계속 저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피터 버거(Peter Berger)와 그의 동료들이 ‘세계의 탈세속화(desecularization of the world)’에 대한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여전히 세속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서구에서 물려받은 신학의 일반적인 의미의 틀 밖에서, 우리의 문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필리핀의 학자들에 의한 연구에서, 인구의 약 82%를 차지하는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 교회 출석과 같은 일반적인 의례의 지표는 감소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18세에서 24세 사이의 경우 73.3%, 25세에서 39세 사이의 경우 79.9%) 기도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젊은 세대가 여전히 종교적이지만, 제도권 종교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라는 것이다.
환멸은 신자 사이의 진정성 부재에서 비롯된다. 연구자에 의해 요약된 젊은이들의 태도는 ‘올바른 신앙보다 올바른 삶이 더 중요하다’이다. 따라서 미사에 참석하거나 심지어 부패하고 영향력이 크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가난한 공동체가 집을 짓도록 돕거나 혹은 재난 피해자를 구호하는 인도주의 봉사를 더 선호한다.
새 포도주 부대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명령으로 이끈다. 즉 복음의 끊임없는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포도주 부대를 혁신할 필요성이다. 우리는 미디어와 시장이 교회는 물론 교육 기관마저 대체하여, 융(Jung)이 말하는 바와 같이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형성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가와 그것과 같은 강력한 기관들은 이제 대규모 인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술을 손에 쥐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독재자들이 먼저 하는 일이 미디어에 재갈을 물리거나 혹은 그것을 사용해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양한 관점이 제한되고 편향된 의견이 지배할 때 선전(propaganda)은 번성하며, 이는 정보에 입각한 건설적인 사회를 육성하는 데 심각한 도전을 제기한다.13
바울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거짓을 퍼뜨리고 그것을 대중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기술에 굳게 자리 잡은 악마의 권세일 가능성이 크다. 악한 정부의 배후에 ‘정사와 권세’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미디어도 성경이 ‘권세’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장악될 수 있는 구조 중 하나일 수 있다.
서로 다른 내러티브의 충돌 속에서, 교회는 진실을 전하는 존재로서 정치적 공간에 들어가야 한다. 예술가와 소통의 힘을 가진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성경적 문해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래서 대중의 상상력을 창의적으로 자극하는 새로운 아이콘과 상징을 만들 수 있다.14 또한, 이제 신앙은 일반적인 기관 밖에서 실천되고 있다. 특히 원자화된 사회에서, 어떻게든지 연결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가상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한 연구 조사는 젊은이들이 인터넷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콘텐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연결됨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급진적 정치를 향하여
기독교 관점에서 급진적 정치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가치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변혁적이고 흔히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적용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책 결정 방식은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정의와 연민을 요구하는 성경적 요청을 강조한다. 이것은 빈곤, 인종차별, 성에 기반한 차별과 폭력, 조직적 부패, 그리고 기타 형태의 사회적 불의와 같은 문제들을 다루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종종 모든 개인의 평등, 공정, 그리고 존엄성을 증진하는 정책과 관행을 옹호하는 것을 포함한다.
팔레스타인의 교훈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으로서, 이 글의 한 저자는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인한 여러 차례의 전쟁과 계속되는 잔혹 행위들의 역사 속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반추한다. 이러한 갈등의 결과로,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동 제한, 성지 접근성, 그리고 사회-경제적 어려움과 같은 여러 가지 고통과 제약을 경험한다. 팔레스타인 교회는 급진적 정치, 신앙, 그리고 대위임령의 어려운 교차점에 놓여 있다.
팔레스타인 상황에서, 복음적인 교회는 독특한 도전과 역학에 직면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그 지역의 복잡한 정치 상황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이에 대응하여, 팔레스타인의 복음적인 교회는 성도들에게 영적 지도, 목회적 돌봄, 그리고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공동체를 섬기고자 힘쓴다. 또한, 교회는 종교와 관계없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참여한다. 이는 교육, 보건 의료, 빈곤 완화, 그리고 평화-구축 노력과 관련된 이니셔티브를 포함할 수 있다.
교회는 흔히 정의, 화해,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다양한 공동체 사이의 분열을 해소하고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일부 팔레스타인 복음주의자들은 갈등을 다루고 공정하며 평화로운 해결을 촉진하기 위해, 이스라엘 기독교인들과 국제 기독교 단체들과 대화에 참여한다. 많은 급진적 기독교인들은 비폭력의 원칙을 고수한다. 그것은 사랑, 용서, 그리고 다른 뺨을 돌려대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었다. 대가가 어떻든지, 본회퍼(Bonhoeffer)의 모범과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기독교는 폭력, 독단, 그리고 권력의 오만에 대한 혁명적인 항의와 약자를 위한 탄원으로 인해 그 성패가 갈린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점들을 명확히 하는 데 너무 소극적이다.… 기독교는 권력 숭배에 너무 쉽게 적응한다. 기독교인들은 현재보다 훨씬 더 세상에 충격을 주고, 더 많은 논란을 일으켜야 한다.15
평화적 저항
이것은 결코 쉬운 부르심이 아니다. 하지만 무바라크 아와드(Mubarak Awad)에 의하면,16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그는 말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비폭력 연구를 위해 Palestinian Center에 와서 말한다. ‘이스라엘 군인들, 이스라엘 정착자들이 와서 우리의 수백 년 된 올리브 나무들을 모두 뽑았어요.’ 그러면 저는 ‘좋아요,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해 드리길 원하시나요? 그 나무들을 찾아서 되돌려다 주길 원하나요?’라고 물었고, 그들은 ‘아니오, 우리는 그 나무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죠. 저는 ‘좋아요, 그러면 그룹을 만들어,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하여 같이 갑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100그루, 1,000그루의 나무들을 가져갔다. 우리는 4,000그루의 나무들을 심어서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원래보다 더 많은 나무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무바라크는 ‘팔레스타인 간디’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폭력의 사용을 거부하고, 대신 평화적인 저항과 변화의 방법들을 장려했다. 폭력에 반대하기 위한 비폭력적 방법들의 중요성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급진적인 기독교 정치는 창조세계 돌봄을 도덕적 의무로 간주한다. 우리가 문화적 명령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수백만의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이 명령은 우리가 사회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다스리고 피조물이 황폐하게 되지 않고 번성하도록 이 땅을 관리하는 것이다. 성경 시대처럼, 하나님에 대한 급진적 신앙을 보여주는 것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지배적인 제도와 구조에 도전하는 예언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에 진실을 말하고 그들의 기독교 가치관과 교훈에 반대하는 정책과 관행을 비판해야 한다. 시인 엘리엇(T.S. Eliot)이 한때 표현했듯이,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또한 ‘교회가 세상에 간섭해야 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17
하나님 나라의 가치
극단적 정치는 종종 사회 정의, 평등, 그리고 소외된 공동체의 복지를 강조한다. 일부 개인과 교회는 이러한 가치들을 그들의 신앙과 대위임령을 완수하는 부르심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조직적인 불의를 해결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필수적인 측면이라고 믿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나라의 주요한 가치 중 하나는 비폭력이다. 이러한 측면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거나 혹은 충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항상 대안은 있다. 갈등이 무엇이든지, 문제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당신은 대안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에 타협하지 않으면서 때로는 국가적 혹은 국제적으로 광범위한 참여가 필요하다. 이것은 연대를 보여줄 기회인 것이다.
많은 급진적 정치 운동은 비폭력적 활동과 시민의 불복종을 변화를 이끌어낼 수단으로 강조한다. 일부 기독교 개인들과 집단들은 비폭력적 행동이 사랑, 용서, 그리고 왼편 뺨도 돌려대라는 예수의 교훈과 일치한다고 믿으면서, 이러한 운동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들은 이를 신앙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정의를 옹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결론
결국, 급진적 정치, 교회, 신앙, 그리고 대위임령의 교차점은 복잡하고 미묘할 수 있다. 이것은 개별적인 믿음, 성경의 해석, 그리고 신학의 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이 그들의 정치적 참여와 사회 정의 추구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측면을 모으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연합하는 것을 촉진할 수 있는 통합 기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만일 교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관련성을 갖기를 원한다면, 예언의 목소리가 되어 모든 곳, 심지어 그곳이 교회의 내부일지라도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불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며, 그로 인해 그들은 열방에 대한 우리의 열정과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금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이 드러나는 사회적 행동이 이루어지는 공동체, 즉 진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 중 일부는 독재 사회에서 살고 있겠지만, 초기 교회도 그들을 지배한 권위주의 기관에 대해 비판을 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동체는 변화되어 새로운 문화 양식을 채택했고, 결국에는 계급, 인종, 그리고 성별의 장벽을 뛰어넘고 그레코-로마 문명을 파괴하는데 기여한 새로운 사회 윤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
주
- Cf. Naomi Klein. This Changes Everything: Capitalism vs. The Climate (New York: Simon & Schuster, 2014).
- Cf. Chantal Mouffe. For a Left Populism (London: Verso, 2018).
- Astrid Bötticher. ‘Towards Academic Consensus Definitions of Radicalism and Extremism,’ Perspectives on Terrorism 11(4), 73-77. Accessed 9 June 2023. https://www.jstor.org/stable/26297886.
- Cf. Angela Davis. Freedom Is a Constant Struggle: Ferguson, Palestine, and the Foundations of a Movement (Chicago: Haymarket Books, 2016).
- Alexandre Christoyannopoulos and Anthony T. Fiscella. ‘Religious Radicalism,’ in Routledge Handbook of Radical Politics. Ed. Ruth Kinna and Uri Gordon (New York: Routledge, 2021), 492-509.
- Cf. Bell Hooks. Feminism Is for Everybody: Passionate Politics (Cambridge, UK: South End Press, 2000).
- Reinhold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 Study in Ethics and Politics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3), xxxiv.
- Tom Holland. Dominion: The Making of the Western Mind (London: Abacus, 2019), 516.
- John Gray. Seven Types of Atheism (London: Allen Lane, 2018), 1.
- Cf. note 5 above.
- Andrew F. Walls. The Missionary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 Studies in the Transmission of Faith (Maryknoll, NY: Orbis Books, 1996).
- Thus fanning the emergence of movements with a radical political agenda.
- Cf. Timothy Snyder. On Tyranny: Twenty Lessons from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Tim Duggan Books, 2017).
- Cf. Makoto Fujimura. Art and Faith: A Theology of Making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21).
- Dietrich Bonhoeffer. Dietrich Bonhoeffer Works, English edition. 13:402. 본회퍼가 1934년 어느 날 런던에서 행한 설교이다.
- 아와드(Awad)는 팔레스타인 점령에 대한 비폭력 저항에 참여한 저명한 기독교 팔레스타인 지도자이다.
- TS Eliot. Christianity and Culture: The Idea of a Christian Society and Notes Toward the Definition of Culture (San Diego / New York / London: Harcourt Brace & Company).
- Mubarak Aw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