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대위임령이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문구 중 하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대위임령은 현대의 복음주의 활동에 힘을 실어준 가장 위대한 슬로건이었다. 대위임령은 마태복음 28:18-20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성경에서 바로 튀어나온 구절처럼 들리는 그 표현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더욱이, ‘대위임령’이 대중적으로 사용된 지 150년이 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평가를 얻게 되었을까?
이것을 처음으로 선교적 설교의 전면에 가져온 인물은 허드슨 테일러(1832-1905)였다. 그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제목으로 대위임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네덜란드 선교사 유스티니안 폰 벨츠(Justinian von Welz, 1621~1688)의 글에서 차용한 것 같다. 폰 벨츠가 살던 그 무렵까지 1600년 동안 이 마태복음 본문은 주로 ‘선교학에 대한 팡파르가 아니라 교회론의 삼위일체적 기초’라는 더 넓은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1 마태복음 절정인 이 본문의 현대적 적용은 기독교 선교에 필요한 맥락을 제공하는 마태복음의 기독론적, 교회론적 강조를 의도치 않게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사적 기록은 중요하다.2
그러나 세계 복음화를 위한 성경적 기초로서 마태복음(그리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별 말씀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보다 앞섰다. 이 말은 현대 선교의 전환점이 된 1792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의 열정적인 호소에 자극을 주었다.3 그는 다음과 기록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고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 이 위임령은 가능한 한 광범위한 특징을 띠고 있는데, 예외나 제한을 두지 않고 거주가 가능한 지구상의 모든 나라로 퍼져 나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그들에게 부과했다.4
결과적으로, 대영 제국의 전성기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새로운 추진력과 함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참신한 주목을 받았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나타나신 내용을 기술한 이 본문(pericopes)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기대한 것을 명시한 흩어진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도들은 국제적이며 세계적인 그들의 선교사역의 범위에 주목했는데, 이는 기존 유럽 제국주의와 잘 부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본문은 지역 교회들이 타문화권 선교와 세계 복음화에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이상적인 성경적 근거로서 시선을 끌기 위해 경쟁했다.
대위임령의 근거
대체로, 대위임령은 주 예수께서 그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 사도들을 통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맡기신 명령을 언급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마태복음 28장 18~20절은 첫 번째 부르심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부르심(창 12:1~12)으로 거슬러 올라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소환의 절정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인류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한 백성을 자신에게 부르시는 것이다.5 이 주제는 성경에서 계속 전개된다. 구약성경에서 ‘대위임령’ 주제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명령 중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넘어 열방에 베푸신 크신 사랑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창 12:1~3)이나 이방 나라들이 여호와의 길을 따라(이사야 2:1~4) 교훈을 받기 위해 시온으로 향하게 될 날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적 환상에서 이 약속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방 나라인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욘 1:2)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구약성경의 전반적인 이상을 강력하게 예시한다.
대위임령의 신약성경의 근거
가장 유명한 대위임령 본문은 예수님이 열한 사도들에게 직접 고별 교훈을 하신 모음집에서 따온 것이다. 기본적인 참조 본문인 마태복음 28:18~20 외에도 대개 마가복음 16:15, 누가복음 24:46~49, 사도행전 1:8 본문이 포함된다.6 종합하면 이 본문들은 여러 공통적인 맥락을 공유한다.
첫째, 이 본문들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고조된 모습과 관련하여 언급된다. 초대교회에서 이런 내러티브와 그 내용은 승리한 지도자의 유언으로써 큰 의미를 얻었을 것이다. 둘째, 그러한 모든 경우에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수행해야 할 책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셨다. 즉,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며'(마태복음), ‘복음을 선포’하고(마가복음), ‘증인이 돼라'(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개되는 교회 이야기에서 우리는 증언을 통한 복음화, 선포와 능력의 나타남, 세례를 통한 입교, 그리고 가르침을 통한 성숙한 제자도라는 이런 활동들이 어떻게 무대의 중심을 차지했는지 볼 수 있다. 셋째, 이 본문들 각각은 ‘모든 나라'(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모든 피조물'(마가복음), ‘땅끝'(사도행전)이라는 온 세상의 모든 인류를 가리켰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선택된 본문들은 타문화권 선교에 동기를 부여하는 이상적인 원재료를 제공했으며,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 선교를 위한 수정된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기독교인들은 이전에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던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개인적인 증거와 공적인 선포를 통해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도록 긴급한 부르심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선택된 대위임령 본문들의 명시적인 요구 사항들이 선교 사역에 관한 신학과 실천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왔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 기독교 선교에서 축소할 수 없는 최소한으로 간주한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고 사회 변혁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대한 강조는 점점 더 소외되고 종종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러한 복음화와 관련된 선포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분리는 전 세계 기독교에 엄청난 긴장을 조성하고 교회는 그 긴장을 어느 정도 해결하려고 가차 없이 밀어붙일 것이다. 후에 요한복음(20:19-23)에 나오는 ‘대위임령’을 인식하고 적용함으로써 교회는 바로 그런 긴장과 소외현상을 해소할 수 있었다.
마태복음 28:18-20: 대위임령의 권위, 범위, 목적
마태복음의 대위임령은 마태복음7 전체의 관심사를 훌륭하게 요약하며,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예수님이 교회에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원천으로 널리 간주한다.
대위임령은 따라야 할 명령, 순종하라는 명령, 그리고 실행하라는 명령으로 공표되었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당성을 지닌 명령이었다. 스티브 하손(Steve Harthorne)에 따르면,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분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 그분은 결코 자신의 왕권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목적이 충만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으실 것이다.’8
즉, 대위임령은 단지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선언 그 이상이다. 대위임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우주적 주권을 선포하는 선언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이 그분만 따르도록 하기 위해 다른 충성심, 종교, 거짓 신들, 그리고 모순된 이념을 버리도록 촉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다.
대위임령은 모든 정사의 주관자이며 만물의 소유자인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온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임의 무게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빚을 알려준다.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고 그분의 말씀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마태복음의 공식은 ‘모든’이라는 용어로 표시되는 포괄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놀랍다.
1. 모든 권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포괄하는 권세를 확신시켜 주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예수님은 명령을 내리고, 결정하며, 순종을 강요할 권리가 있다. 이 권세는 훔치거나 강탈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정당하다(빌 2:9-11). 더욱이 그 권세는 이 세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상과 천상 영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권세다. 위임하는 자는 책임을 맡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5:22, 27).
대위임령이 이 권세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그 일을 완수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 권세로 우리는 우리가 해악에서 구출될 것이라고 확신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케’ 하셨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히 2:8).
2. 모든 민족: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 .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을 통해 대위임령의 무한한 범위를 확립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가서 선포하라는 부르심이 아니라 ‘열방을 제자 삼아라'(모든 종족 집단에게 메시아를 진정으로 따르도록 인도하는 것)는 부르심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엄선된 소수의 집단이 아니라 모든 집단에 해당된다. 이런 대위임령의 확장된 범위는, 모든 세대에 걸쳐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타당한 주장을 고려하도록 모든 세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부르심은 세대와 국가에 걸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예배자들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순종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위임령의 성취는 이동 거리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께 충성하기 위해 헌신하고 양육된 사람들의 제자도의 질로 측정된다.
3. 분부한 모든 것: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람들은 그의 모든 명령을 가르쳐야 한다. 대위임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요구에 대해 선택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금지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고르고 선택하거나 추가할 수 없다. 예수님의 지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4. 항상: 예수님이 사명을 마무리하신 방식은, 대위임령이 수행되는 상황이나 기후에 상관없이 그분의 임재가 계속된다는 것을 내포한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끝은 위험과 환란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도래할 시간의 끝이나 세상의 끝을 의미할 수 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 끝까지 갈 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위로가 된다. 이 선언에는 예수님의 영원한 임재의 확실성과 명망과 능력이 따른다.
최종 목적인 제자 삼기
‘제자 삼으라’는 것은, 마태복음 28:19에 나오는 예수님의 핵심 명령이다. 헬라어에는 이 희귀한 동사 명령형인 mathēteuō가 독특하게 사용된다.9 ‘세례를 베푸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분사형으로 나타나며, 제자 삼으라는 주요 명령에 종속된다.10 대위임령의 제자도 임무는 전 세계적이며 교훈적으로는 타문화권 선교에도 적용된다. 대위임령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백성과 방언과 족속과 언어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을 본다. 예수님은 여기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ethnos)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이것은, 지정학적 국가를 ‘종족 집단’으로 일반화하는 것 이상인데,11 오늘날 세계에는 대략 17,453개의 종족 집단이 존재한다.12
수많은 선교 단체의 후원 아래 수천 명의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2/3세계의 복음화는 전례 없는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 19세기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개척된 기독교 공동체는 20세기에 서구 복음주의 단체들의 대규모 복음전도 활동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남반구 전역에서 전례 없이 많은 토착 선교 운동이 상황적으로 효과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노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기하급수적인 교회 성장이 일어났고, 21세기에 들어 기독교의 모습은 더 이상 전형적인 백인이 아니라는 놀라운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전 세계 기독교의 이미지는 아프리카 흑인, 라틴 아메리카 또는 동아시아인일 가능성이 더 높다.13 2002년에 필립 젠킨스(Philip Jenkins)는 2025년에 추정되는 26억 명의 기독교인 중 6억 3천3백만 명이 아프리카에, 6억 4천만 명이 라틴 아메리카에 그리고 4억 6천만 명이 아시아에 살 것이며, 유럽은 5억 5,500만 명으로 3위로 밀려날 것이라고 예측했다.14
티모시 테넌트(Timothy Tennent)는 남반구에서 독립적인 토착 기독교 운동이 ’20세기 전환기에 겨우 800만 명에 불과했지만, 21세기 말에는 4억 2,300만 명으로’ 전례 없이 5,000%로 성장했다고 주장한다.15
기독교 초기 이래, 이전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사회에서 기독교가 이렇게 급속히 성장한 적은 없었다. 예를 들어, 중국, 이란, 네팔과 같은 아시아 지역의 교회 성장에 대한 가장 최근의 이야기는 기적에 가깝다. 왜냐하면 복음은 지속적인 반대와 적대감이 최고조인 공산주의, 이슬람, 힌두교 상황에서 번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와 사도 시대 이후와는 달리, 현대 교회의 증거에 대한 헌신은 제자 삼는 헌신을 수반하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오늘날 글로벌 기독교 영성이 ‘길이 1마일, 깊이 1인치’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싸우고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 선포의 필요성을 주장하려는 복음주의 교회의 열정 속에서, 활기 넘치는 교회 공동체의 신실한 증거에 따라 나타날 새로운 신자들의 추수를 위해 교회가 적절하게 준비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는가?
요한복음 20:19-23: 대위임령을 위한 패러다임
우리는 선택된 대위임령 본문의 특징인 구두 증언과 선포에 관한 명시적인 강조가 교회의 선교적 명령인 자선과 사회적 행동에 대한 오랜 기독교 전통을 어떻게 무효화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위에서 언급했다. 이러한 긴장은 이후 ‘사회적 행동’와 ‘복음전도’의 불행한 분리(dichotomization)를 초래했고, 20세기 대부분 선교 활동을 끈질기게 괴롭혔다.16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대위임령’ 본문이 명성을 얻게 되었다(요 20:19-23). 요한복음의 대위임령(Johannin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불리는 이 본문을 대위임령 구절들에 포함하는 것은, 우리의 대위임령 신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대위임령의 타당성과 성경적 이해에 대한 공헌을 능숙하게 보여준 인물로 정당하게 인정받는다.17 이것 역시 예수님의 부활 후 나타나심과 교훈에 대한 기록에 속했지만, 구체적인 책임이라는 점에서 이 본문의 명백한 모호함으로 인해 대위임령 본문에 포함되지 않았다(‘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18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주어진 교훈과는 달리, 요한복음의 대위임령은 ‘선포’나 ‘증거’와 같이 신자들이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과업에 관해서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또한, ‘모든 민족’, ‘모든 피조물’, ‘땅끝’과 같이 교회가 자신의 위임을 수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자세히 다루는 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명령에 대한 교회의 이해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요한복음의 이 독특한 공식은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참여하는 범위를 상당히 확장한다. 요한복음의 대위임령(20:21)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을 위한 의제를 설정하기보다 그들이 수행해야 할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에 수반되는 과업과 활동이나 그것이 수행될 장소를 특정하는 대신, 요한복음의 지상위임령의 독특성은, 그들이 무엇을, 어디에서 해야 하는지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대위임령의 대리인의 자세로서 성육신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였는가?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내심을 받았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어떻게 보내셨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요한의 서문과 아들과 그의 선교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으로 즉시 돌아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여기서 우리는 신적 아들의 근본적인 자세가 성육신이었으며, ‘육신이 되셨다’와 ‘거하셨다’라는 두 개의 두드러진 용어들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전자와 관련하여 요한은 의도적으로 육체성, 신체적 한계, 필멸성, 열정을 함의하는 그리스어 sarx (육체)를 사용했다. 당시 그리스 세계관에서 sarx는 영적이고 고귀한 세계관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요한은 신적 아들의 성육신을 묘사하기 위해 anthrōpos(인간)나 sōma(몸)와 같은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sarx를 급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선교를 수행하도록 ‘보냄’ 받았을 때,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보하려는 그의 의도를 강조한다. 그분은 자신의 ‘몸’(flesh)을 완전히 인간과 동일시하신다.
두 번째 용어인 ‘거하시다’는 요한이 성육신적 기독론의 목적을 위해 고안한 독특한 동사 eskenōsen의 번역이다. 요한은 명사 skenos(장막, tent)를 사용하고, 이스라엘의 구약 성막을 암시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1:14)과 ‘은혜’(1:17)가 반역적인 인류에게 중재됨으로써 예수님의 선교가 어떻게 세상에 안정된 임재를 요구했는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독특한 동사 ‘장막을 치셨다’라는 단어를 고안했다.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그러한 이해는 우리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인격과 전체 사역이라는 더 넓은 틀에서 대위임령의 개념을 설정하도록 몰아간다. 교회에 대한 선교 명령은 더 이상 단순히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선택된 본문에만 국한될 수 없다. 후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로 증거하는 교회의 소명에 예리한 초점을 제공할 수 있는 한편, 요한복음 본문은 우리에게 그 소명에 대한 조화로운 패러다임과 더 넓은 요구를 포용하도록 도전하고 지시한다.
우리가 대위임령을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더 온전히 이해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공적 선포, 긍휼의 행동, 능력의 입증, 의미 있는 임재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분의 지속적인 증언에 어떻게 원활하게 엮으셨는지 주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구세주와 주님인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복음전도적 증언이 교회의 선포와 실천, 그리고 세상에서의 현존을 통합함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대위임령에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열망해야 할 것은 선교적 우선순위의 이런 통합이다.
결론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대위임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죄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인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영광을 받을 때까지, 모든 하나님 나라의 선교와 모든 종족 집단의 복음화를 추구한다. 이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그들을 움직인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좋은 소식의 수혜자라면,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제자, 즉 학생과 추종자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 성령은 우리에게 증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에게 배우고 있다면,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은 너무 좋아서 혼자만 간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함께 나누도록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항상 우리를 인도하여 예수님에 관해 증거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다(요 15:26; 16:14).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억 명의 추종자들과 수 십만 개의 교회가 있다. 그러나 대위임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위임령의 마음과 생각을 가진 적합한 교회가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수행하려고 노력하면서 따름의 목적으로 일치된 신자들의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우리는 대위임령의 핵심을 이해하는 교회 지도자가 필요하다.
대위임령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미래는 세상 끝에서 왕을 경배하는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와 언어의 현존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마지막은 선교가 아니라, 예배다. 선교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19 달리 말하면, 대위임령이 성경적 신실함으로 수행될 때, 세상 모든 열방이 왕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주
- Robbie F Castleman. ‘The Last Word: The Great Commission: Ecclesiology’ Themelios 32, issue 3 (2007), 68.
- ‘이 말씀을 마태복음에서 떼어내어 그 자체의 삶을 허용하고 그 말씀이 처음 등장한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해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New York: Orbis, 1991), 57.
- Timothy Tennent, Invitation to World Missions (Grand Rapids: Kregel, 2010), 258-264 참조.
- William Carey, 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 (London: Hodder & Stoughton, 1792), 7.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을
- ‘모든 나라로부터 나온 교회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구약 백성을 계승한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부르심을 받았고 모든 나라를 위한 복과 빛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다.’ The Cape Town Commitment in J Cameron ed. The Lausanne Legacy (Massachusetts: Hendrickson, 2016), 124에서 발췌.
- 만일 우리가 이러한 ‘대위임령’ 구절(예수님이 사도들에게 구체적인 책임과 관련하여 직접적이고 분리된 지시)을 식별하는 논리를 따른다면, 사도행전 26:15-18과 같은 이와 유사하지만 무시되는 또 다른 본문이 우리의 관심을 요구할 것이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바울이 위대한 사명을 받은 이야기이다. 비록 바울의 고백처럼 그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8)이지만, 사도행전은 바울을 사실상 열두 번째 사도로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독특한 위임과 교회의 선교에 대한 우리 주님의 의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극히 중요한 ‘이방인의 사도'(갈 2:8)로서 소명의 범위를 구성한다. 현대 세계 선교를 위한 신약성경의 근거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이러한 잠재적인 참고문헌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 ‘마태는 마치 불타는 유리 속에 있는 것처럼,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이 말에 집중했고 그것을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최고의 정점으로 두었다.’ Gerhard Friedrich cited in Bosch, Transforming Mission, 57.
- Ralph D Winter and Steve Hawthorne ed. 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A Reader (Pasadena: William Carey, 2009), 99–101.
- 네 번에 걸쳐 matēteuō가 나오는 가운데, 세 번은 마태복음에 나온다(마 13:52, 27:57, 28:19; 행 14:21).
- ‘이 모든 노력을 포괄하는 것이 제자화다. 그것은 사역의 다른 요소들(파송하고, 가고, 설교하고, 증거하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고, 성령을 받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목적을 위한 모든 활동, 즉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계속하여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남자와 여자-을 지시한다.’ Robert E Coleman. The Great Commission Lifestyle (Grand Rapids, MI: Revell, 1992), 19–20.
- Coleman, Great Commission Lifestyle, 20: ‘이 단어들은 지리적 경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의 모든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 ‘Global Summary.’ The Joshua Project. Accessed 29 September 2023. https://joshuaproject.net/.
-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2: ‘고정관념은 기독교인이 흑인이 아니고, 가난하지 않고, 젊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점차적인 서구의 세속화는 기독교가 죽어가는 시대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래 종교는 이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기독교 세계의 무게 중심은 가차 없이 남쪽, 즉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로 이동했다.’
- Jenkins, Next Christendom, 3.
- Timothy C Tennent. ‘Lausanne and Global Evangelicalism: Theological Distinctives and Missiological Impact’ in Margunn Serigstad Dahle, Lars Dahle, Knud Jorgensen eds. The Lausanne Movement: A Range of Perspectives (Oxford: Regnum, 2014), 58.
- ‘기독교 선교의 복음전도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 사이의 관계는 선교 신학과 실천에서 가장 까다로운 영역 중 하나이다.’ Bosch, Transforming Mission, 401.
- 요한복음의 “대위임령”은 선교학자나 복음전도자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최근에 우리는 요한복음의 대위임령에 대해 공개적인 인정하는 데 있어서, “세계복음화를 위한 제1차 로잔 대회의 설계자”(1974)인 존 스토트(John R. W. Stott)에게 빚지고 있다. Mortimer Arias and Alan Johnson. The Great Commission–Biblical Models for Evangelism (Nashville: Abingdon, 1992), 79.
- ‘[존 스토트]는 “대위임령의 다른 세 가지 주요 버전”(공관복음서)을 구두로 선포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에 그것을 놓쳤다고 고백했다. Arias and Johnson, The Great Commission, 79.
- John Piper. Let the Nations Be Glad! The Supremacy of God in Missions (Grand Rapids: Baker, 200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