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이해
트랜스휴머니즘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응용 이성(applied reason)을 통해 인간의 조건, 특히 노화를 방지하고 인간의 지적, 신체적, 심리적 능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기술을 개발하며 널리 보급함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가능성과 희망을 긍정하는 지적, 문화적 운동이다.
-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의 파급력, 약속, 잠재적 위험에 대한 연구와 그러한 기술의 개발 및 사용과 연관된 윤리적 문제에 대한 관련 연구다.1
모든 이념과 마찬가지로 트랜스휴머니즘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철학적 선구자들에 의해 그 토대가 구축되었다. 트랜스휴머니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존재 또는 실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연구’)과 계몽주의 휴머니즘(‘존재의 본질 또는 실재에 대한 철학적 연구’2)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트랜스휴머니즘은 다윈주의적 자연주의(인간 존재는 최근 진화한 존재이며 인간이 자신의 진화를 통제하고 가속화해야 한다3), 니체의 초인(Übermensch) 개념(트랜스휴머니즘 사상에서 스스로 창조한 자아 개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4), 마르크스주의 이념(‘혁명을 위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 특히 진화를 위한 기술 발전,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 그리고 일반적인 자연의 개념’5)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념적 우선순위 측면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은 전통적인 일신교와 다신교의 타당성을 거부하고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일부 지지자는 신앙과 트랜스휴머니즘 철학을 통합하려고 노력하지만, 대다수의 지지자는 불가지론자 혹은 무신론자이다.6
그러므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초월적인 영원한 진리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성경과 같이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메타 내러티브도 무시한다. 또한, 트랜스휴머니즘은 전통적인 가족 가치의 중심성에 반대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의 신체적 표현을 바꾸는 실행 가능한 수단으로서 성전환(transsexualism)과 성전환 수술(practice of gender reassignment)을 인간의 진화적 진보를 통제하는 양상으로 보기 때문에 성전환 이념을 지지한다. 실제로 트랜스휴머니즘은 첨단 기술과 의료 혁신을 인간 생물학에 적용함으로써 인류의 진화적 진보를 통제하고 가속하는 데 초점을 둔다.
트랜스휴머니스트는 인간을 인간답지 않은 존재로 만든다는 이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전공학, 분자 나노기술, 슈퍼컴퓨터, 보철, 생명공학, 냉동공학, 마인드 업로드, 복제, 가상현실, 인공지능(AI)과 같은 현재와 미래의 기술을 활용하여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인지 및 신체 능력을 높이며, 질병과 고통을 제거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할 것을 주장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제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러한 포스트휴먼(posthuman, 인간을 넘어선 신 인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궁극적으로 트랜스휴머니스트는 인간과 기계의 시너지 효과를 촉진하여 기술 기반의 사이버 불멸성(cyber immortality)을 구현하기를 희망한다. 이는 현재의 인간 현상학의 한계가 포스트휴먼 유토피아, 즉 인간이 육체적 몸이 아닌 디지털로 구현된 완벽한 상태로 존재하는 미래로 발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목격한 대부분의 공상과학 영화와 놀랍도록 비슷하게 들린다면, 우리는 트랜스휴머니즘 세계관의 관점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 중 일부는 질병 치료, 인간의 고통 제거, 경제 성장 촉진, 그리고 인류 번영에 대한 전반적인 기여와 같이 철학 분야 밖의 사람들과 공유되지만, 그 목표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교리와 트랜스휴머니스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은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이자 척도로 삼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인간, 죄, 성육신, 구원, 속죄의 의미, 용서 등에 관한 성경적 교리와 모순되기 때문에, 21세기에 선교적인 성경적 복음 제시에 대한 도전으로 부상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신념과 실천과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고유한 피조물인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해체하여 우리가 더 이상 현재의 모습을 포기할 때까지 계속 진화하는 육체와 기계의 혼종으로 재정의하려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가 달성될 수 있는지는 교회의 주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도전은, 트랜스휴머니즘 철학의 광범위한 영향력과 그것이 향후 25년간 세상과 교회와 대위임령에 미칠 영향을 인식하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영향
세계
트랜스휴머니즘은 단순히 바라는 미래의 상태가 아니라, 이제 주류 문화의 일부가 된 일련의 주제이다. 하바 티로스 사무엘슨(Hava Thiros Samuelsson)은 이를 적절하게 지적한다.
‘[. . .] 오늘날 트랜스휴머니즘은 주류 문화의 변두리에 있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트랜스휴머니즘의 주제, 어휘, 가치, 스타일로써 현대 문화를 형성하는 현대 영화, 공상과학, 공포 장르, 비디오 게임, 공연 예술, 뉴미디어 아트, 문학, 사이버펑크(cyberpunk) 등을 구성한다. 오늘날 육체, 성, 주관성, 감정, 사회성과 같은 인간의 모든 양상은 유기체와 기계의 융합(hybridization), 인공 지능, 새로운 디지털 및 가상 미디어, 사이버 공간, 온라인 게임, 디지털 집단, 네트워크 정보, 뉴미디어 아트로 인해 완전히 변형되었다. 만일 우리가 현대 문화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문화 전반에 침투한 트랜스휴머니즘에 관한 주제를 무시할 수 없다.7
유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결합을 시도하는 문화적 현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트랜스휴머니즘 아이디어와 기술에 대한 일반적인 수용 수준을 최고조로 야기하는 특정 타당성 구조가 있다.
트랜스휴머니즘 문헌에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평가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맥스 모어(Max More)와 같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트랜스휴머니즘은 (휴머니즘과 마찬가지로) 더 높은 힘, 초자연적 실체, 믿음에 호소하지 않으며 종교의 다른 핵심 특징 없이도 종교와 동일하게 기능하는 삶의 철학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8 ‘대지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Mother Nature)에서 모어는 인간 조건에 대한 7가지 수정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더 이상 노화와 죽음의 폭정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9 우리는 유전자 변형, 세포 조작, 합성 장기 및 필요한 모든 수단을통해 우리 자신에게 지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하고 유통기한을 제거할 것이다. 우리 각자가 얼마나 오래 살지는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에는 여러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한 가지 공통적인 반대 의견은 트랜스휴머니즘 세계가 윤리적, 정치적으로 분열될 위험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상업적 이해관계와 개인적 이해관계가 강화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사람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관심사는 기술이 스스로를 복제하고 개선할 수 있다면, 어떤 인간(트랜스휴먼 혹은 포스트휴먼)이 설 자리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체성 문제도 있다. 트랜스휴먼의 출현은 어떤 지위(도덕적이고 정신적인)를 갖게 될 것인가? 트랜스휴먼의 출현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성의 파괴를 초래할 것인가?
교회
인간 다움의 의미를 고양하고 자연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시도는 세속적 담론에서 종종 ‘하나님 놀이'(playing God)로 묘사된다. 하나님 놀이는 인간이 기술의 힘을 행사하여 스스로를 과도하게 확장하고 인간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신이 부여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퍼키스(Ferkiss)는 ‘만일 새로운 인간이 원시적 인간의 동물적 비합리성과 산업적 인간의 계산된 탐욕과 권력과 욕망을 결합하면서 기술이 부여한 사실상 신과 같은 힘을 소유한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묻는다.10 신적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분명 은유적이지만, 이 관행은 미끄러운 비탈길이다. 위에서 언급한 우리의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강력한 기계를 하나님으로 대체하는 단계는 그리 멀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기계와 권력이 주는 인상 때문에 인류와 교회는 기술 우상숭배(technological idolatry)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은 트랜스휴머니즘 기술에 대한 경고를 제기하는 반면, 다른 신학자들은 긴박감을 가지고 기술의 사용을 장려했다. 테드 피터(Ted Peter)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윤리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과 인간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이타적이고 자비로운 희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 불멸과 종말론적 불멸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1 필립 헤프너(Philip Hefner)는 ‘창조된 공동 창조자’로서의 인류는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혼종(hybrid)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12 ‘창조된 공동 창조자’라는 개념을 창안한 해프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수준의 자유를 행사하여 우리의 활동이 우주의 전개(unfolding of the cosmos)에 기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가너(Garner)는 기독교인들이 지구상의 다른 존재의 평원(plain of existence)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시민’이며,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에는 혼종성과 사이보그에 대한 근거 있는 전통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13
그렇기 때문에 복음 중심주의와 인간의 죄성에 대한 정직한 인식으로 견고한 신학적 입장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기독교의 신념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다. 하나님을 놀리는(play God, 신처럼 무제한의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행동하는 것-역자 주) 시도는 죄악된 교만으로 흥미를 유발할 수 있으나, 겸손의 미덕은 트랜스휴머니즘을 추구하므로 해체된다. 인공두뇌(cybernetic)의 불멸성이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이자 인간의 최종 진화로 귀결되기 때문에 트랜스휴머니즘은 독특한 세속적 종말론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닌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만 이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는 기독교 종말론과 상반된다. 공공 영역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이 필요하며, 특히 윤리가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대위임령
트랜스휴머니즘의 구원론적 메시지는 우리가 제한적이고 연약한 생물학적 감옥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의 전략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불멸의 몸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영원한 목표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서 이러한 변화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표현한다. 창세기는 기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발전시키는 데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포함한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공간, 시간, 물질의 창조, 창조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지배권 부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라는 주제는 기술의 개발 및 사용, 즉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 방식과 연관성을 갖는다.
대위임령 활동을 위한 기회와 도전
트랜스휴머니즘은 사람들에게 두렵기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큰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트랜스휴머니즘에 관한 주제가 넘쳐나는 오늘날, 누구든지 문화적 차이와 교육적 배경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도 이러한 질문을 다른 사람과 가상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아마 역사상 전례가 없을 것이다. 노화 방지나 마인드 업로드과 같은 기본적인 트랜스휴머니즘 관련 주제를 생각해 보라. 비록 트랜스휴머니즘의 사고에 대해 훈련 받지 않은 사람이 처음에는 이러한 이슈에 대한 트랜스휴머니즘의 과장에 관해 무시하거나 유보적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실존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우리가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영원히 살고 싶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주제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상황을 초래한다. 오늘날 인류는 인터넷과 글로벌 문화와 정치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전의 문화적 상황은 기술만큼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 역시 기술(또는 자크 엘룰[Jacques Ellul]이 말한 ‘기술’)을14 좋거나 나쁘게 사용될 수 있는 단순한 도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술은 우리가 살고 움직이며 존재를 드러내는 총체적 환경이다.
교회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비전에 변증적으로 응답하도록 부름 받았으며, 그 부르심의 일부는 복음이 우리의 기술 문화적 상황에서 전해지고 이해될 수 있도록 가교를 놓는 것이다. 우리가 제안하는 가교를 놓는 과업은 본질적으로 분별력을 키우는 과업이다(롬 12:1-2). 복음화와 관련된 네 가지 요점을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1. 응답하지 않는 방법
트랜스휴머니즘의 도전에 대한 두 가지 공통적이지만 효과적이지 않은 대응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상대적으로 하찮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단순히) 그것을 종말론적 악몽과 동일시하여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이며, 다른 모든 새로운 이념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시간을 갖고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트랜스휴머니즘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므로 회피와 공포의 태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회와 지도자들은 이러한 극단 사이에 놓인 가느다란 줄 위를 걸어야 한다.
2. 공통의 관심사, 다른 해결책
앞서 살펴본 것처럼, 트랜스휴머니즘과 기독교는 (모든 종류의) 죽음과 고통의 문제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과 같은 궁극적인 관심사를 공유한다. 이러한 공통의 관심사가 비록 기독교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인간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에 대화의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솔직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종종 이러한 심오한 질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이상에 의해 형성된 문화 역시 인생의 큰 질문에 더 깊이 관여하는 성향이 있다.15 기독교적 대응은 트랜스휴머니스트의 과장을 무시하는 대신 근본적인 실제 관심사를 다루는 것이다.
3. 교회의 눈먼 상태
(역사상 다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화적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자체의 문제들로 가득 할 것이다. 교회의 한 가지 문제는, 우리가 이미 삶에 관한 트랜스휴머니스트의 비전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과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혹은 전하지 않는) 방식을 형성한 수많은 미묘한 방식에 대해 지적, 도덕적, 영적으로 눈먼 상태에 처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와 평신도는 하나님의 집(교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다. 트랜스휴머니즘을 다루는 것은, 단순히 ‘저 밖의’ 세상의 현상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과 마음에도 스며들어 있는 문제다.
4. 트랜스휴머니즘과 물질주의
분별력은 세속적 지식과 하나님 중심의 실재에 대한 견해에 비추어서 거짓되거나 일관성이 없는 우리 시대 우상들의 가면을 벗겨내는 일을 수반한다. 교회의 신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중요한 영역 중 하나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내재된 유물론이다(‘유물론’은 물질이 전부이며 물질 이외의 다른 설명이나 원리는 필요하지 않다는 교리). 앞서 언급했듯이, 트랜스휴머니즘의 유물론은 우리가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킬 것이다. 자크 엘룰(Jacques Ellul)이 논평했듯이, ‘기술이 인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낼 때, 그것은 인간을 물질적 대상으로 전환한다.’16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의 맹렬한 물질주의는 기술의 ‘인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도전은 대중적, 철학적 측면에서 유물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사례를 제시한다는 사실에 있지만, 단순히 어떤 형태의 유물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이나 물질 자체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자. 트랜스휴머니즘은 궁극적인 실재가 물질이라는 생각에 전념하면서도 마음을 정보의 형태로 말하며, 마음의 특징을 뇌가 아닌 다른 하드웨어에 업로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마음과 물질에 대한 해석은 새로운 형태로 삶을 바꾸고 스스로 ‘개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정보 형태로써 인간에 대한 시각을 담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생각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과 인간의 자율성, 즉 자기 삶의 형성을 방해하는 어떤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현대적 관점의 통합을 발견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수사학은 이러한 문제를 (가까운 미래의) 견고한 과학의 형태로 제시하며, 물질적이면서도 영적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고전적 기독교의 관점을 편리하게 비껴간다. 교회는 유물론적 도전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갖춘 고전적 인류학(classical anthropology)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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