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4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우리는 지평선에 눈을 돌리고 지금부터 2050년까지 향후 수십 년간 지상대위명령의 성취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확실성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이분법적으로 살고 있음을 겸허히 인식해야 한다.
나는 2050년을 형성할 아이디어들이 오늘날 대학, 출판사, 중역 회의실, 인플루언서 컴퓨터와 마음속에서 형성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구체적인 발전이나 사건들이 우리의 미래를 형성할 촉매제가 될지 확신할 수는 없다. 기술의 발전부터 미래에 일어날 전쟁에 대한 소문, 사회의 발전부터 교회 형태의 흥망성쇠까지 모든 것을 과감히 예측하는 자생적인 미래 예측이 난무한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모든 구체적인 예측은 불확실하며, 불확실한 생각들을 재정리 하기 위해 힘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대신, 우리는 문화에 대한 신중한 연구, 상황화된 행동, 그리고 성령님의 운동을 허용하기 위해 느슨하게 수립된 계획을 옹호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전 세계의 대화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가정해 보라. 그럴 때, 우리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복음의 좋은 소식을 상황에 맞게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다음 10가지 질문은 특정한 순서 없이 오늘날 세계가 묻고 있으며 향후 30년 동안 계속해서 묻게 될 핵심적인 질문들이다. 이에 대한 응답은 2050년에 우리가 맞이할 세상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상대위임령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상대위임령의 맥락을 구성할 10가지 질문
인간됨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세계에서는 인공 지능, 생체 의학 공학, 유전자 편집, 나노 기술, 로봇 공학, 낙태법, 성별, 성적 및 인종 정체성의 발전이 관찰되는 추세이다. 이러한 주요 신흥 트렌드는 세계가 다양한 각도에서 묻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을 드러낸다. ‘인간됨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의 트렌드는 각각 인류의 의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인간됨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메시지의 맥락을 바꿀 만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인류를 재정의함에 따라 지상대위임령에 대한 많은 부가적인 질문들이 등장한다.
- 누구나 우리 자신과 주변 환경에서 인지된 결함을 간단히 ‘편집’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필요성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는가?
- 우리 자신의 사회학적, 생물학적 정체성을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우리 자신의 형상을 따라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진 가짜 신들이 부상하는 가운데 기독교 하나님의 고유성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과 하나님,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이 질문들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상황에 맞는 복음 선포와 제자도의 핵심이 될 것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으며,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삶을 형성하는 질문이다. 그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다른 땅으로 이주한 수많은 사람들부터, 자신들의 핵심 공동체를 물리적 이웃에서 디지털 공동체로 자발적으로 이전하는 방대한 전 세계 인구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갖는 질문이다. 우리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의 선교적 노력을 생각할 때, 이 질문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에서 ‘가다(go)’를 적극적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이민, 이주, 디아스포라가 유례없이 많이 발생함에 따라 국가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시대에 모든 국가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공동체는 개인적으로 전혀 만나보지 않고도 이념적으로나 디지털상으로 함께 묶여 있는 경우가 많다. 지역 사회가 더 이상 지리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을 때 교회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반대로 이것은 동일한 지리적 위치에 뿌리를 둔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기독교 공동체와 아웃리치는 ‘공동체’가 점점 더 문화적으로 분열되고, 지리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기술의 도움으로 지상대위임령을 위한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세상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공정하고 공평한 분배란 무엇인가?
재화의 공평한 분배와 세계의 지역 및 국가 간의 영향력 사이에 벌어지는 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자원과 시스템에 대한 불균형한 접근은 역사적으로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영향력은 우리 세계에 긴장을 고조시킨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집단 간의 체계적 불균형은 가중되고,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공정하고 공평한 분배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이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되기를 원하는 교회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토론의 중심이 되어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두 그룹 모두를 위한 적극적인 아웃리치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 어떻게 교회가 문화/문화적 인플루언스들에게 반감을 유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들 중에 가장 작은 자’를 옹호할 수 있을까?
- 지역적 또는 세계적인 규모로 형평성에 따른 균열이 발생할 때 교회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빛을 발할 것인가?
인구통계학적 변화는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2050년에는 국가와 지역이 현재와 같지 않을 수 있다. 일본과 같은 나라는 인구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인도와 같은 나라는 엄청난 인구 증가를 경험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 내에서도 청소년 또는 노령 인구 비율의 변동에 따라 연령 분포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특정 문명 안에서 사회적 역학 및 계층 구조에 압력을 가하는가?
전반적으로, 세계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기존의 기반 시설의 많은 부분에 도미노 효과를 일으키고, 이는 도시와 종교 인구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인구통계학적 변화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라는 것은 지상대위임령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의 핵심 질문이다.
우리는 인구 통계학적 변화가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을 알고 있지만, 교회는 그러한 변화와 함께 오는 격차와 기회를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지상대위임령 중심의 단체는 이러한 변화에 따라 중심을 잡아나갈 위치에 있는가?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은 (지역에 따라) 증가하는 청소년, 노인 또는 중산층 인구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복음과 제자 훈련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른 지역보다 더 도시화되거나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 대한 노력을 재조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궁극적으로 교회는 변화 속에서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도록 교회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
어떻게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에 이를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지속 가능성에 이를 것인가?’ 라는 긴급한 질문은 여러 부문에서 균형 잡힌 길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문화 보호 지지자들은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미지의 목적으로 착취하지 않도록 교회와 사회가 절제된 존재가 되도록 요청하고 있다.
온건한 경제학자들은 가족과 국가의 부채 비율 증가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보다 지속 가능한 길을 요구하고 있다.
많은 지역의 교회조차도 재정적으로 그리고 프로그램상으로도 더욱 지속 가능한 길을 찾기 위해 운영을 재고하고 있다.
지속 가능성에 대한 긴급한 질문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복음의 메시지를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천국의 영역을 향한 개별적인 도피만을 말하는가, 아니면 샬롬을 향한 모든 피조물의 구속을 이야기 하는가?
디지털 라이프란 무엇인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디지털과 기술의 발전은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변화시켰다. 사회적 관계에서 경제 거래, 가상 작업, 정보에 대한 접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한 세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이러한 변화에 대해 더 많이 반추하고 있으며 이제는 ‘디지털 라이프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다.
지금 우리가 ‘디지털 라이프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우리는 ‘디지털 라이프에서 지상대위임령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은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도 해야 한다.
이 질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 우리는 어떻게 디지털 커뮤니티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 알고리즘 터널에서 생성된 소셜 미디어 에코 챔버(social media echo chabers)는 어떻게 복음의 메시지를 방해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어떻게 이 터널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가?
- 원격 가상 작업은 직업과 일터 사역의 개념을 어떻게 바꾸는가?
- 디지털 시대의 교회 개척은 어떤 모습인가?
- 디지털 시대의 성서 참여(Scripture engagement)와 제자도란 무엇인가?
-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상이 아닌 실재의 존재로 다시 불러들이는가?
세상이 삶의 본질을 재정의함에 따라, 우리는 지상대위임령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디지털 라이프의 상황화와 디지털이 아닌 존재의 핵심 원칙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시각적 효과가 진실을 검증하는 도구로 남을 것인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각적 이미지가 말을 능가하고 제품의 질이 진실성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 시각적 문화가 철학적 전환을 근본적으로 초래했거나 최소한 강화했다. 과거에는 진실이 알려져 있었고 객관적인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오늘날, 진실은 그래픽, 이미지 및 비디오 제작의 품질에 의해 생성되거나 저해되는 감정적 반응의 수준에 의해 주로 검증된다.
시각 문화로의 전환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문제는 ‘이것이 지속될 것인가?’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 추세가 바뀌는 전환점이 생길 것인가?’하는 것이다. 향후 수십 년 동안의 핵심 질문은 ‘시각적 영향이 진실을 검증하는 도구로 남을 것인가?’이다.
시각 문화로의 전환은 지상대위임령을 성취하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노력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질문은 남아 있다. 교회는 시각 문화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지상대위임령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분별해야 한다. 즉, 교회가 중대한 상황화 이니셔티브(initiative)로서 시각적 문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지와 교회가 객관적 진리를 얼마나 옹호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복음주의와 개신교는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단순히 자금이 부족한 부차적 프로젝트나 조직적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넘어 지상대위임령을 위한 노력을 주도하도록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교회는 역사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시각 문화에 대한 헌신을 통해 문화 큐레이션(curation)을 다시 이끌 것인가?
이런 질문은 복음을 전하는 메시지의 진실성을 인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신뢰의 기반은 무엇인가?
점점 더 다원화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많은 설명적 이데올로기(explanatory ideologies)를 신뢰하고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고수되고 그 수가 증가함에 따라 ‘신뢰의 기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더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할 것이다.
과학과 실증주의는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진정성(authenticity)과 감성주의(emotivisim)의 윤리가 자기진실(self-truth)의 기준이 될 것인가? 경쟁하는 종교 이데올로기는 국가와 지역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미디어와 선전(propaganda)은 신뢰를 구축하거나 저하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사람들은 지도자가 부패하지 않고 윤리적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일반적인 문화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교회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다른 경쟁하는 설명적 이데올로기와 구별되는 신뢰할 만한 지식의 원천인가? 복음의 메시지는 신뢰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저 선전일 뿐인가?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윤리적이고 부패하지 않다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복음의 메시지의 선포할 수 있는 힘을 크게 약화시키거나 그것을 입증할 것이다.
희망은어디에있는가?
희망은 모든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2050년 사이에 사람들이 희망을 걸 수 있는 다양한 선택들이 역동적인 방식으로 확장될 것이다.
종교를 넘어 희망의 토대를 노리는 경쟁자들은 급진적 정치 지도자, 자아실현, 대중의 권력, 비판 이론 등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와 달리, 사람들은 세속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실용적인 것들을 희망할 뿐 아니라 치유와 영생을 위한 사이비 초월적 수단으로서 기술의 발전에 대한 희망을 점점 더 갖게될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는 세상과 복음 메시지의 타당성에 대한 중요한 질문이다.
교회는 다른 전통적인 희망의 길을 넘어서는 설득력 있는 선택으로서 복음의 소망(gospel hope)을 전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더 적절하게 표현하자면 이것은, 기술의 발전이 경쟁적인 영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일 때 교회는 복음을 통한 소망의 고유성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4차 산업혁명이 고비가 올 때마다 표면적으로는 완벽하게 최적화된 삶을 이야기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삶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세상이 어디에 신뢰를 두며 반대 이념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문제는 지상대위임령을 형성하게 될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가 묻게 될 핵심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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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형태는 무엇인가?
위의 질문에 비추어 볼 때 다음 질문은 ‘교회의 형태는 무엇인가?’이다.
로잔운동은 주로 지상대위임령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것이지만, 교회의 더 넓은 형태를 다루는 이 질문을 우리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교회 주변의 세상이 변해도 그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형태에 관하여, 그리고 향후 30년 동안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교회의 형태에 대하여 많은 질문이 제기되었고 그 질문들은 앞으로 수십년동안 지속될 것이다.
교회는 2050년의 세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미래는 근본적으로 불확실하지만 그것이 발전하기를 기다리면 우리는 단순한 반응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게 된다. 나는 세계 교회가 단순하게 반응하는 자세에서 2050년의 세계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자세로 변하도록 대화의 불씨를 지피고자 한다. 함께 대화를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