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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나에게: 1974년 로잔부터 2024년 서울-인천까지의 성찰

29 5월 2024

나는 1974년 7월의 일기를 찾았다.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복음화를 위한 제1차 로잔대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나이 27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4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내 존재의 근간을 흔들었다. 또한 그것이 올해 한국에서 우리를 연결할 수 있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1974년 7월 16일 주일의 내 일기장은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라고 쓰여 있었다. 유대인인 내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국제 대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미국 유대인 문화와 유대교 관습의 사회적 체제 안에서 자랐다. 한때 나의 세계관은 ‘유대인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 우린 그냥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변화의 짧은 이야기는 1970년에 시작된다.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반문화적 도전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 두 가지 어려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즉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라는 나의 단순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를 놀라게 하셨다. 내가 망가졌다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분명해졌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었다. “그래, 나는 망가졌지만, 당신이 나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나를 고치기 위해 무엇을 하셨나요?”

그때까지 나는 신약성경에 대한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궁금해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요한복음을 읽었는데, 처음에는 창세기 1장처럼 들렸는데,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14)라고 말씀하시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내가 메시아 예수를 믿었을 때 구세주께서는 내 죄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씻어 주셨다. 나는 그분께 “제가 여기 있습니다”[1]라고 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물론 당신은 그냥 웃으며 넘겨도 된다.

몇 주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목사님께 세례를 요청하고 편도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향했다. 나는 이스라엘로 떠났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예루살렘에서 나는 예수님의 제자된 메시아닉 쥬이시(Messianic Jewish,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유대인, 역자 주)로서 믿음의 여정을 걷도록 나를 돕는 유대인과 아랍인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공동체를 발견했다.

그동안 내 안에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내 민족, 유대인에게 메시아는 예슈아(Yeshua, 예수)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또한 2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내 운명은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예수를 위한 유대인(Jews for Jesus)’의 원년 멤버들과 연결되었다. 대부분 전통적인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60년대 후반에 전형적인 반문화 운동을 하며 살았다.

우리는 유대인 특유의 대담함으로 공공장소에서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크레즈머(klezmer) 스타일의 유대인 가스펠 송을 작곡하고 ‘예수님이 나를 코셔(Kosher, 유대인들이 먹기에 합당한 음식, 역자주 )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도발적인 제목의 팸플릿을(소책자를-권유) 만들어 배포했다. 우리는 유대인과 예수에 대한 유대인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고자 했다. 1973년 9월, ‘Jews for Jesus’의 주창자이자 창립자인 모이쉬 로젠(Moish Rosen)은 우리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편입시켰다. 4개월 후, 26세의 나이에 첫 번째 ‘현장 선교사’로서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그 무렵, 선교학자들은 우리의 토착적인 복음 전파 방식에 주목했다. 모이쉬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리는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대회에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모이쉬는 새로운 선교를 시작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사과와 함께 거절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로잔에 보냈다. 나는 세계복음화대회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가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5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경험과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에 감사하며 내 일기를 되돌아보고 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한 1974년 당시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몇 가지 관찰 사항을 공유하게 되어 기쁘다. 내가 얻은 교훈은 연결, 발견 그리고 기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라, 형제가연합하여거하는것이얼마나선하고즐거운가. (시133:1)

연결

주님은 헌신된 제자들이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할 때 기뻐하신다. 제1차 대회 때부터 제4차 대회까지 로잔운동의 목적은 ‘세계 선교를 위해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현재와 역사적으로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로잔운동의 비전은 20세기 초를 돌아보는 데서 출발했다. 이 시기는 세계 선교가 급속도로 확장된 시기였다. 1910년 6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세계 선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1,215명의 대표가 모여 당시 세계 선교 현황에 관한 8개의 보고 위원회의 발표를 들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발포 경(Lord Balfour)이 의장이었고, 학생 자원봉사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감리교 지도자였던 모트(John R. Mott)가 의장을 맡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모트는 번성하는 국제 복음주의 공동체의 토착적인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IMC는 ‘이 세대의 세계복음화’에 초점을 맞춘 선교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하나로 모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가 결성되어 IMC를 흡수했다. 그 무렵,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해 초기의 국제 선교에 대한 활력이 사라졌다.

로잔운동은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과 성직자이자 학자 존 스토트의 우정에서 시작되었다. 1974년 대회에서 그들은 다시 한 번 세계 복음 전도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동원하고, 집중하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선교학자, 신학자, 교회 성장 실무자, 숙련된 복음 전달자들이 모여 예수님의 대의를 위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며 격려함으로써 교회의 복음 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확실히 믿었다. 로잔은 여전히 세계 선교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극하기 위해 핵심적인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있다. 올해 말 대한민국 인천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그들은 선교학자, 신학자, 교회 성장 실무자, 숙련된 복음 전달자들이 모여 예수님의 대의를 위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며 격려함으로써 교회의 복음 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확실히 믿었다

나는 연결의 가치를 깊이 배웠다. 나는 20년 동안 로잔 유대인 전도 협의회(Lausanne Consultation on Jewish Evangelism, LCJE) 회장으로 섬겼다. 1980년 로잔 위원회는 태국에서 미전도 종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 실무자들을 위한 소규모 콘퍼런스를 후원했다. 한 특별 위원회(task force)는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인의 복음 증거에 관한 것이었다. 13명의 유대인 선교 참가자들과 모이쉬 로젠을 포함한 5명의 컨설턴트들이 유대인 전도 전문가 네트워크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44년이 지난 지금, 로잔 유대인 전도 협의회(LCJE)는 8개 지역 연합 네트워크에 속한 29개의 글로벌 유대인 선교 기관을 연결하고 있다. 이들은 호주, 북미, 한국, 일본, 라틴 아메리카, 유럽, 이스라엘, 남아프리카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보고하고, 기도, 전략 및 협력적인 전도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LCJE는 28개의 로잔 이슈 네트워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네트워크이다.

발견

1974년 대회 참가자들은 “온 땅으로 복음을 듣게 하자(Let the Earth Hear His Voice)”를 불렀다. 나는 서구의 지배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초대받은 유대인 아웃사이더로서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이사야 49장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메시지, 즉 내 백성이 열방의 빛이 되도록 선택받았다는 말씀을 믿고 자랐다.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지만,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를 포함한 우리 유대인 모두가 민족 중심적(ethnocentric)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많은 민족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다양한 지리적 위치, 다양한 문화권에서 왔으며 각자의 고유한 사역을 통해 주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다.

나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라 회의에 참석하려면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한다. 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이야기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배우면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방법을 배웠다. 이러한 발견은 그분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다.

어느 저녁 `74 대회에서 친구들이 나를 얼라이언스(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C&MA, 미국 C&MA의 일본 선교를 통해서, 한국의 성결교회가 시작되다, 역자주)가 주최하는 식사에 초대했다. 나는 매력적인 각 민족적 요리로 가득한 접시를 받아 들고 두 명의 낯선 사람들에게 내가 함께 해도 되는지 물어보며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들의 친구 네 명이 더 우리 테이블에 합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아랍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앞에 있을 새로운 인연, 사람들, 그리고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중 일부는 여러분의 사역과 앞으로의 선교 사역에 인생을 바꿀 만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나는 이스라엘에 살면서 기독교인, 무슬림, 그리고 세속적인 아랍인들을 만날 수 있는 많은 좋은 기회를 가졌다. 3개월간의 여행 동안 나는 터키에서부터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까지 아시아 전역을 여행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여기서 다 할 수는 없다. 단지 1974년쯤 되면 아랍어를 하는 여섯 명의 새로운 친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말하고 싶다. 결국, 대회에서 우리는 모두 구세주의 피로 씻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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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그들이 내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임을 알았다. 그로 인해 그들 사이에 아랍어로 활발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한 사람이 그들이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이집트 출신이라고 설명했다. 그들 중 누구도 이전에 유대인을 만난 적이 없었고, 예수를 믿는 유대인은 더더욱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의 문화적 및 국가적 차이를 초월한 교제의 유대감이 즉시 형성되었다. 그날 밤 우리는 각자 다른 전도 사역과 열정 속에서 일하며 메시아 예수께서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약속하신 ‘더 큰 일’을 발견했다.

1989년,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은 주류 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유대인 전도 활동에 대항하려고 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안에서 구원의 길이 있고, 유대인들은 모세와 유대교 신앙을 통해 자신들만의 구원의 길이 있다는 가설에 동의하여, 두 언약 신학(two-covenant theology)의 개념을 촉진했다.

나는 로잔운동에서 형성된 다른 중요한 목소리들과의 인연을 통해 우리가 우정을 나누었고, 그들이 우리의 목적을 돕기 위해 나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명의 국제적인 신학자들, 교회의 남녀 지도자들, 그리고 선교학 학자들을 모으기 위한 협의회가 소집되었다. 그 회의에서 나온 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과 유대인을 위한 윌로우뱅크 선언(Willowbank Declaration)으로, 이는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독특한 구원의 길을 확언하는 것이었다 (행 4:12).

발견의 기쁨, 협력, 그리고 영감은 내가 로잔 네트워크를 통해 경험한 예상치 못한 혜택 중 일부이다. 4차 로잔대회 기간에 여러분 앞에 있을 새로운 인연, 사람들, 그리고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중 일부는 여러분의 사역과 앞으로의 선교 사역에 인생을 바꿀 만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기회들

첫 번째 로잔대회에서 나는 영적 돌파가 일어나고 있는 곳에 대한 보고에 놀랐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아주 멋진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에 대해 생각할 때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임무보다 종말론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나는 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Global Diaspora Network)를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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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리 조이 티라(sadiri Joy Tira) 목사와 나의 멘토이자 선교학 학자인 에녹 완(Enoch Wan)은 2004년 태국 파타야에서 열린 로잔 모임에서 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GDN)를 출범시켰다. 디아스포라는 1948년까지 2,500년에 걸친 유대인의 삶의 경험이었다. GDN은 디아스포라를 신학적 중요성 측면에서 생각했다.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을 흩으셔서 자신의 의로움과 언약에 대한 신실한 성품을 증명하셨다. 하나님은 제자들을 흩으셔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셨다. GDN은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새로운 전도 기회를 열어주는 디아스포라 인구에 대한 나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유대인이방인 커플 사역

로잔운동 내에게서 이루어진 많은 사역의 연결과 발견은 내 삶과 사역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지금, 내 경력의 정점에서 유대인-이방인 커플을 위한 전문 사역에서 그 영향을 실감하고 있다.

1990년 국립 유대인 인구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모든 유대인 중 52%가 혼인 중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결혼을 했다고 보고되었다. 그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2020년 PEW 리서치(미국의 여론조사 단체, 역자 주) 연구에 따르면, 현재 미국의 모든 유대인 중 47%가 혼혈 결혼을 한 상태라고 보고 했다. 이들 유대인은 디아스포라의 순간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복음의 영적 발견에 열려 있다.

로잔 공동체는 나에게 다문화 연구, 선교 전략 및 사려 깊은 복음 전도 참여를 위한 혁신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우리의 유대인 복음전도 협의회 워크숍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논문을 발표하며, 다른 사람들을 전도 사역에 동참하도록 훈련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1974년 당시에는 그런 어떤 결과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 짧은 이야기들로 인해 여러분이 제4차 로잔대회에서의 시간을 기대하며 설레게 하기를 희망한다. 그곳에서 추억을 만들고, 그로부터 주님이 주실 교훈을 기대해 보라. 축복을 빌며, 앞으로의 시간이 열매 가득한 사역으로 충만해지길 기도한다.

Endnotes

  1. Tuvya Zaretsky, Hineni: Here Am I, God, but Where are You? (San Francisco, CA: Jews for Jesus,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