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는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로잔 언약이 발표되었다. 1989년 7월에는 약 170개국에서 3,000여 명이 같은 목적으로 마닐라에 모여 마닐라 선언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우리는 필리핀 형제자매들에게 받은 환영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두 대회 사이의 기간인 15년 동안, 복음과 문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 검소한 생활양식, 성령, 중생과 같은 주제로 소규모의 신학협의회들이 모였다. 이런 회의와 거기에서 나온 보고서들은 로잔 운동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선언’이란 신념과 의도와 동기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닐라 선언은 이번 대회의 두 개의 주제인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를 선포하라’와 ‘온 교회가 온 세상에 온전한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 전반부는 21개 항목의 신앙적 고백(affirmations)으로 구성되었으며, 후반부는 12항목으로 주제를 설명했다. 교회들은 이 선언을 로잔 언약과 함께 연구하며, 실천에 옮기기를 바란다.

21개 항의 고백

1. 우리는 ‘로잔 언약’을 로잔 운동을 위한 협력의 기초로 삼아 계속 헌신할 것을 단언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뜻 그리고 그분의 구속 행위와 그 의미를 권위 있게 드러내실 뿐 아니라 선교를 명하고 계신 것을 단언한다.

3. 우리는 성경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우리 세계에 주시는 메시지임을 확언하며, 이 복음을 변호하고, 선포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것을 단언한다.

4.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죄와 죄책이 있으며, 그리스도 없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복음을 이해하기 앞서 알아야 할 진리임을 단언한다.

5. 우리는, 역사적인 예수와 영광의 그리스도가 동일한 분이며, 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음을 이기신 분이요, 재림하실 심판자이므로, 절대 유일한 분임을 단언한다.

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에 근거해서만 회개와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값없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단언한다.

7. 우리는,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또 다른 길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영성은 하나님께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이른다는 것을 단언한다.

8.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의식주의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봄으로써 그 사랑을 실천적으로 입증해야 함을 단언한다.

9. 우리는,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개인적인 것이든 구조적인 것이든 모든 불의와 억압을 고발하면서, 이 예언자적 증거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을 단언한다.

10.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전도에 있어서 절대 필요하며, 따라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이는 중생이나 새로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언한다.

11.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위해서는 영적 무기가 필요하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선포하며, 정사와 악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해야 함을 단언한다.

12.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알리는 과제를 부여하셨음을 믿기 때문에 평신도나 성직자나 모두가 다 이 일을 위해 동원되고 훈련되어야 함을 단언한다.

13. 몸 된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믿고 행하는 우리는 인종과 성(性)과 계층을 초월하여 성도의 교제를 나눠야 함을 단언한다.

14. 우리는, 성령의 은사가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복음 전도에 있어 함께 동역하여 선을 이루어야 함을 단언한다.

15.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거룩함과 사랑을 생활 속에서 드러내야 함을 단언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증거는 그 신빙성을 잃게 될 것이다.

16. 우리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에서 복음 증거와 사랑의 봉사에로 눈을 돌려야 함을 단언한다.

17. 우리는, 교회와 선교 단체 그리고 그 외 여러 기독교 기관들이, 전도와 사회 참여에 있어 경쟁과 중복을 피하면서 상호 협력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함을 단언한다.

18.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과 필요 등을 이해하기 위해 이 사회를 연구하여 적절한 선교 전략을 개발하여 나가는 것이 우리의 책임임을 단언한다.

19. 우리는, 세계 복음화의 긴급성과 아울러 미전도 종족들에게도 전도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세계 복음화라는 과업을 위해 새로운 결단으로 헌신할 것을 단언한다.

20. 우리는,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는 사람들과의 연대 의식을 확인하며, 우리 역시 그와 같이 고난받을 가능성에 대비해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는 일에 힘쓸 것을 단언한다. 아울러 모든 곳에서의 종교적․정치적 자유를 위하여 일할 것이다.

21. 우리는, 하나님이 온 세상에 온전한 복음을 전하라고 온 교회를 부르고 계심을 단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신실하고 긴급하게 그리고 희생적으로 복음을 선포할 것을 결의한다.

A. 온전한 복음

복음은 악의 권세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원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창세 전에 그렇게 하시고자 작정하셨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와 사망과 심판에서 해방시키는 계획을 성취하셨다. 진실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구속된 자들의 사귐 속에서 우리를 연합시키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1. 인간의 곤경

우리는 온전한 복음, 즉 성서적 복음의 충만함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한 자들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남자나 여자 모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고유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들의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다 왜곡되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자신을 섬기는 반역자가 되어, 마땅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인간은 창조주와 또 다른 피조물들에게서 소외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 방황, 고독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죄는 또한 반사회적 행동, 다른 사람들을 극심하게 착취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청지기로서 지키라고 주신 자원들을 고갈시키는 일을 감행한다. 따라서 인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인이며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을 걷고 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부패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인간에게는 이웃을 사랑하고 품위 있는 행동을 하며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할 만한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성취한 것은 제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숙명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어 결국은 하나님의 존재 앞에 합당하지 않다. 남녀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종교적 행동이나 자립을 위한 기술이 인간의 필요를 다소 경감시킬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죄와 죄책과 심판의 준엄한 실재를 근본적으로 피하게 할 수는 없다. 인간의 종교나 인간의 의나 사회 정치적 제도도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 어떤 종류의 자력 구원도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서는 영원히 잃어버린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 하나님의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거짓된 복음들을 우리는 거부한다. 우리는 또한 죄를 극소화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자기 노력과 혼동시키는 사이비 복음들도 배척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때로는 복음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전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철저한 진단과 아울러 하나님의 철저한 치유를 기억할 것을 결의한다.

행 2:27; 창 1:26, 27; 롬 3:9-18; 2 딛 3:2-4; 창 3:17-24; 롬 1:29-31; 창 1:26, 28; 2:15; 롬 1:20; 2:1; 3:19; 7:13; 마 5:46; 7:11; 딤전 6:16; 행 17:22-31; 롬 3:20; 엡 2:1-3; 갈 1:6-9; 고후 11:2-4; 요일 2:22, 23; 4:1-3; 고전 15:3, 4; 렘 6:14; 8:11

2. 오늘을 위한 기쁜 소식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과 절망의 자리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심을 인하여 기뻐한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재창조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러므로 기쁜 소식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겸손한 섬김의 삶을 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대신해 죄와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라는 역사적 인격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예수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새 창조에 참여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시며, 또한 성령의 내주하시고 변혁시키는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인종과 민족과 문화에 속한 각기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우리를 받아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의 새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약속하신다. 그때에 악은 모두 제거되고, 자연 세계가 구속되며, 하나님이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이 복된 소식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며, 우리에게는 이 복음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혹은 공공장소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혹은 옥외에서도 가능한 곳이면 어디서나 담대하게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말씀 전파로써 하나님이 성서에 계시하신 진리를 신실하게 선포하며, 또한 이 복음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우리는 또한 변증론, 즉 복음을 변명하며 확정하는 일(빌1:7)이 선교를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며, 또한 현대 세계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본질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단언한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설득’시키려고 그들과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변론’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신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벧전 3:15).

누가가 강조한 바, 우리는 다시 한 번 복음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된 소식이라는 사실에 직면하면서(눅4:18; 6:20; 7:22) 이것이 세계 각 곳에서 착취당하며, 고통을 당하거나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반문해 왔다. 우리는, 율법, 선지자, 지혜서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 이 모두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따라서 그들을 변호하고 돌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기억한다. 또한 성경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고 있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도 이에 포함시킨다. 복음은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 모두에게 복된 소식이 된다. 경제적 상황과 관계없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오면, 믿음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이외에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다른 길은 없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은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존엄성과 또한 그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형제자매들의 사랑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성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한 것을 회개하며, 그 진리를 변호하며 선포하기로 결의한다. 우리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선호해 왔던 것에 대하여 회개하며, 또한 말과 행동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선포하며 예수님을 따를 것을 다짐한다.

엡 22:4, 눅 15; 19;10; 행 8:35; 막 1:14, 15; 고후 5:21; 갈 3:13; 행 2:23, 24; 고후 5:17; 행 2:38, 39; 엡 2:11-19; 계 21:1-5; 22:1-5; 엡 6:19, 20; 딤후 4:2; 롬 1:14-16; 렘 23:28; 빌 1:7; 행 18:4; 19:8-9; 고후 5:11; 벧전 3:15; 눅 4:18; 6:20; 7:22; 신명기 15:7-11; 암 2:6,7; 슥 7:8-10; 잠 21:13; 습 3:12; 마 5:3; 막 10:15; 요일 3:1; 행 2:44,45; 4:32-35

3.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우리는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부름받았다. 세상에는 옛 종교의 재흥도 있고 새로운 종교가 발생하기도 한다. 주후 1세기에도 ‘많은 신과 많은 주’(고전 8:5)가 있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필수성 및 중심성을 담대히 주장했으며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여야 한다.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피조물 속에서 창조주의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종교 속에 때때로 진리와 미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또 다른 복음일 수는 없다. 인간은 죄 있는 존재이며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기”(요일 5:19) 때문에, 종교적인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음으로 분명히 받아들이지 않고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종종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아라고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언한다. 복음을 “먼저 유대인에게” 전하라는 신약 성경의 모형을 저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불순종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의 한 형태일 수도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으므로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을 배격한다.

우리를 연합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믿음이다. 우리는 그분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다. 그는 온전한 신성을 소유하시면서도 온전한 인간으로 오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해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셨고, 자신의 의를 우리의 불의와 바꾸시고, 변화된 몸으로 승리의 부활을 하셨으며,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님만이 성육신하신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세주이시요, 주님이시며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모든 사람들의 예배와 신앙과 순종의 대상이 되기에 합당한 분이다. 죽음과 부활로 인해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신 분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하나의 복음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종교와 영성이 다같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효한 접근 방법으로 간주하는 상대주의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다른 신앙들을 혼합하려는 혼합주의를 모두 배격한다.

더욱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도록 지극히 높이셨으며, 우리 역시 그렇게 하기를 열망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므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고, 그의 잃어버린 양들을 사랑해야 한다. 특별히 우리는 그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질투’로 인해서도,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합당한 영예와 영광을 받게 되기를 갈망한다.

과거 우리는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무지, 거만, 무례 혹은 대적의 태도를 취하는 잘못을 범해 왔다. 우리는 이에 대해 회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종교와의 대화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도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나 죽음과 부활에 있어 우리 주님의 유일성을 적극적으로 증거하며,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고전 8:5; 시 19:1-6; 롬 1:19, 20; 행 17:28; 요일 5:19; 행 10:1, 2; 11:14, 18; 15:8-9; 요 14:6; 창 12:1-3; 17:1, 2; 롬 3:9; 10:12; 행 13:46; 롬 1:16; 2:9, 10; 행 13:38, 39; 요 1:1, 14, 18; 롬 1:3, 4; 벧전 2:24; 고전 15:3; 고후 5:21; 고전 15:1-11; 마 25:31, 32; 행 17:30, 31; 계 5:11-14; 행 4:12; 빌 2:9-11; 고후 5:14; 마 28:19, 20; 요 10:11, 16; 고후 11:2, 3, 딤전 2:5-7

4. 복음과 사회적 책임

신빙성 있는 참된 복음은 변화된 성도들의 삶 속에 뚜렷이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할 때 우리는 사랑의 봉사에 참여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우리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그 나라의 요청에 헌신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복음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기회를 갖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에 복음 전도가 우선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자비와 능력의 역사로 보여 주셨다. 오늘 우리 역시 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병자를 돌보며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갇힌 자들을 살피며, 억울한 자와 장애가 있는 이들을 도와주며,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영적인 은사가 다양하고, 소명과 상황이 다르더라도 복된 소식과 선한 행위는 분리할 수 없음을 단언한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포는, 그의 나라에 용납될 수 없는 일에 대해 예언자적인 지적을 하도록 요청한다. 우리가 개탄하는 악은, 제도화된 폭력, 정치적 부패, 사람과 땅에 대한 온갖 형태의 착취, 가정 파괴, 낙태, 마약 유통, 인권 유린과 같은 파괴적인 폭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제3세계에 사는 그 많은 사람들이 부채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사실을 마음 아파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계속해서 사회에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위하여 힘쓴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곧 기독교화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라 혼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 복음에는 언제나 사회적 적용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참된 선교는 언제나 성육신적이어야 한다. 참된 선교를 위해서는 겸허하게 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사회적 현실, 비애와 고통 그리고 압제 세력에 항거하며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노력에 동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희생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의 관심과 비전이 작아서 사람들의 공적․개인적 삶이나 지역적․세계적 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심을 선포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한다.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3)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결의한다.

살전 1:6-10; 요일 3:17; 롬 14:17; 롬 10:14; 마 12:28; 요일 3:18; 마 25:34-46; 행 6:1-4; 롬 12:4-8; 마 5:16, 렘 22:1-5; 11-17; 23:5-6; 암 1:1-2, 8; 사 59; 레 25; 욥 24:1-12; 엡 2:8-10; 요 17:18; 20:21; 빌 2:5-8; 행 10:36; 마 6:33

B. 온 교회

온 교회는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전도의 과제를 함께 나누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없이는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얻지 못할 것이다.

5. 전도자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전도의 대장이심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와 사랑과 거룩과 능력의 영이시며, 전도는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도자에게 기름을 붓고, 말씀을 확정하고, 듣는 이를 준비시키며, 죄를 책망하고, 눈먼 자에게 빛을 주고,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게 하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시키며,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과 봉사로 인도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내보내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일에서 성령이 주로 행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며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모든 전도에는 악의 주관자와 세력에 대항하는 영적 싸움이 있다. 이 싸움에서는, 특히 기도와 더불어 말씀과 성령의 영적 무기로만 승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갱신과 세계 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할 것을 호소한다.

진정한 회심에는 언제나 능력의 대결이 있으며, 이 대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한 권위가 드러난다. 믿는 자는 사탄과 죄, 두려움과 허무 그리고 어두움과 사망의 속박에서 해방되는데,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지난 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은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 주며 온 세상이 그에게 굴복하게 되는 그의 완전한 왕국의 도래를 예상케 하는 표적으로서 특별한 것이며, 그것이 과거의 일이라고 해서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제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기사와 이적을 부정하는 회의주의나, 또 그런 것들을 무분별하게 요구하는 무엄함도 모두 배격한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꺼리는 소극성과,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승리주의도 배격한다.

우리는 자만함으로 우리의 힘으로 전도하려 했던 것과 성령을 지시하려 했던 것을 회개한다. 앞으로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이 기쁜 소식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살전 1:5) 전할 것을 다짐한다.

고후 5:20; 요 15:26, 27; 눅 4:18; 고전 2:4; 요 16:8-11; 고전 12:3; 엡 2:5; 고전 12:13; 롬 8:16; 갈 5:22, 23; 행 1:8; 요 16:14; 갈 4:19; 엡 6:10-12; 고후 10:3-5; 엡 6:17; 엡 6:18-20; 살후 3:1; 행 26:17, 18; 살전 1:9-10; 골 1:13, 14; 요 2:11; 20:30, 31; 요 11:25; 고전 15:20-28; 렘 32:17; 딤후 1:7; 고후 12:9, 10; 렘 17:5; 엡 4:30; 살전 5:19; 살전 1:5

6. 증인들

전도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우리를 통해 증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전도자, 선교사, 목사가 되도록 부르시면서도 아울러 온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다 증거자가 되도록 부르신다.

특권으로 받은 목사와 교사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laos)을 성숙한 자로 이끌고(골 1:28) 그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양육시키는 일이다(엡 4:11-12). 목회자들은 사역을 독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은 은사를 사용하도록 격려하고, 제자 삼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함으로써, 사역을 증폭시켜야 한다. 성직자가 평신도를 지배하는 것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악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평신도나 성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고, 또 성직자의 일을 좌절시키고 교회를 약화시켜, 마침내 복음 전파의 방해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이다. 그러므로 여러 세기 동안 ‘믿는 자 모두의 제사장직’을 주장해 온 우리는 이제 또 믿는 자 모두가 사역자임을 주장한다.

우리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교회의 예배를 풍요롭게 하고 열심과 믿음으로 전도함을 인해 감사한다. 제자도와 전도에 있어 그들을 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 세대의 이웃을 전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창조하셨고(창 1:26-27),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이 받아들이시며(갈 3:28), 아들에게나 딸에게나 똑같이 모든 육체에 당신의 성령을 부어 주셨다(행 2:17-18). 그리고 또 성령께서 남자와 같이 여자들에게도 은사를 주시기 때문에, 모두에게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우리는 여성들이 남긴 찬란한 선교 역사의 기록을 찬양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여성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신다고 확신한다. 여성들이 어떤 형태의 지도력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겠지만,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여성도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한다. 이는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이며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적절한 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

남녀 평신도에 의한 증거는 지역 교회를 통해서뿐만 아니라(아래 8번 항목을 보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친교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가정이 없는 자나 직장이 없는 자도 모두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함께 받은 것이다.

우리의 일차적인 책임은 친구, 친척, 이웃, 동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가정에서의 전도는 기혼자에게든 미혼자에게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기독교 가정은 결혼, 성,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을 제시해야 할 뿐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피난처를 제공해 주어야 하며, 우리의 가정은 복음에 관해 말할 때에도, 교회에는 나가지 않으려는 믿지 않는 이웃이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 되어야 한다.

평신도 전도를 위한 또 하나의 상황은 직장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직장에서 보내기 때문이며, 또한 직업이란 하나님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입술의 언어, 일관성 있는 근면, 정직, 신중성, 직장에서의 정의에 대한 관심 및 특히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일의 내용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평신도 사역,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의 사역을 실망시킨 일에 대해 회개한다. 앞으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증인으로서 자기 역할을 하도록 격려할 것을 다짐한다. 참된 전도는 가슴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날 때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전도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속한 일이다.

고후 6:1; 행 8:26-39; 14:27; 엡 4:11; 행 13:1-3; 행 1:8; 8:1, 4; 골 1:28; 엡 4:11-12; 마 28:19; 딤후 2:2; 살전 5:12-15; 고전 12:4-7; 엡 4:7; 마 21:15, 16; 딤전 4:12; 창 1:26-27; 갈 3:28; 행 2: 17-18; 벧전 4:10; 롬 16:1-6, 12; 빌 4:2, 3; 막 5, 18-20; 눅 5:27-32; 행 28:30, 31; 행 10:24, 33; 18:7, 8; 24-26; 고전 7:17-24; 딛 2:9, 10; 골 4:1; 골 3:17, 23, 24; 행 4:20

7. 증인의 성실성

변화된 삶보다 복음을 더 설득력 있게 잘 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개인의 생활이 복음과 불일치하는 것만큼 복음을 비난받게 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거룩한 삶을 통해 복음의 아름다움을 선양하며 복음을 ‘빛나게’ 해야 한다. 우리를 주시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입으로 고백하는 바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는지 찾고 있는데 이는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의 성실성이 가장 강한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선포는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도 우리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할 때, 우리의 공중 예배에 현실성이나 적용성이 결여될 때에는 우리의 증거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소외된 자들을 서로 화해시킨다는 우리의 메시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다른 사람들을 겸손히 섬기고, 또한 우리의 공동체를 넘어 어려운 자들에게 희생적인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야 그들 속에서 역사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우리의 도전은 우리 자신이 먼저 이기적인 야심, 부정직, 탐욕에 대해 철저히 죽고, 검소하게 자족하면서 너그러운 삶을 살 때에야 비로소 타당성이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서나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언행의 일관성이 없음을 뉘우친다. 즉,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물질적인 탐욕, 직업적인 교만이나 경쟁,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의 경쟁, 젊은 지도자들에게 대한 시기, 선교에서의 가부장적인 자세, 상호 책임의 결여, 성에 대한 기독교적 기준의 상실, 인종적․사회적․성적 차별 등에 대하여 개탄하는 바이다. 바로 이 모든 세속적인 것들로 인해 교회가, 세상 문화에 도전해서 그 문화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오늘의 세상 문화가 교회를 붕괴시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 말로는 그리스도를 긍정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리스도를 부정했던 것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의 일관성 없는 삶으로 인해 증거가 신뢰성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에게 계속적인 갈등과 실패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과 교회의 성실성을 개발해 나갈 것을 결의한다.

고후 6:3, 4; 빌 1:27; 딛 2:10; 골 4:5, 6; 잠 11:3; 벧전 3:18; 요일 1:5, 6; 고전14:25, 26; 엡 2:14-18; 엡 4:31-5:2; 갈 5:13; 눅 10:29-37; 막 8:34; 마 6:19-21; 31-33; 딤전 6:6-10, 17, 18; 행 5:1-11; 빌 1:15-17; 고전 5:1-13; 약 2:1-4; 1 요 2:15-17, 마 5:13; 마 7:21-23; 요일 2:4; 엡 4:1

8. 지역 교회

모든 기독교 회중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지역적인 표현이며 동일한 책임을 지고 있다. 회중은 하나님께 예배라는 영적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며, 또한 전도로 하나님의 덕을 널리 전파하는 ‘거룩한 나라’다(벧전 2:5-9). 이와 같이 교회는 예배하며 증거하는 공동체요, 모이고 흩어지는 공동체요, 부름받고 보냄을 받은 공동체다. 예배와 증거는 불가분의 것이다.

지역 교회의 일차적인 책임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성경은,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고” 그리고 “너희에게로부터 들린다”(살전 1:5, 8)라는 순서로 복음 전파에 대해 언급한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게 하고 이 복음은 다시 계속적인 연쇄 반응 속에서 더 많은 교회들을 세우게 한다. 더 나아가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이 가장 좋은 전략이라고 믿는다. 각 지역 교회는 그 처해 있는 지역을 복음화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할 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선교에 대한 더 적절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모든 회중이 개 교회의 교인들이나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모든 특성을 정기적으로 연구할 것을 권한다. 이런 사역을 위해 교인들은 그 지역 내의 모든 구석구석을 찾아갈 방문단을 조직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특정 지역에도 침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전도 집회, 강좌 또는 연주회를 마련하거나, 지역의 빈민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가난한 자들과 함께 일할 수도 있다. 또는 주변 지역이나 이웃 마을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가 그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이웃을 복음화하는 교회가 세계 선교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모든 일에 있어, 각 교회 회중과 교단은 경쟁심을 협동심으로 돌이키도록 노력하면서, 가능한 곳에서 다른 교회 및 교단과 더불어 사역해야 한다. 교회는 또한 여러 선교 기관들과도 더불어 일해야 하는데 특별한 전도, 제자 양육, 사회봉사에 있어서는 관계 기관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러한 기관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가치 있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 교회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한 표징이 되도록 의도하셨다. 즉, 인간 공동체가 하나님의 의와 평화의 통치 아래 있을 때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개인에게 서나 교회에서 복음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요일 4:12), 특히 작은 모임 안에서 우리가 서로 친교를 나누며 여러 공동체들을 분리시키는 인종 차별, 계층, 성, 연령의 장벽을 초월하게 될 때 자신을 계시하신다.

우리는, 많은 교회들이 내부 지향적이어서 선교보다는 자체 유지를 위해 조직되어 있고 전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개 교회 중심 활동에만 몰두하고 있던 것에 대해 깊이 회개한다. 우리는 교회를 일신시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때까지(행 2:47) 계속 밖으로 뻗어나가는 일에 전념할 것을 결의한다.

고전 12:27; 벧전 2:5, 9; 요 17:6, 9, 11, 18; 빌 2:14-16; 살전 1:5, 8; 행 19:9, 10; 골 1:3-8; 행 13:1-3; 14:26-28; 빌 1:27; 눅 12:32; 롬 14:17; 살전 1:8-10; 요일 4:12; 요 13:34, 35; 17:21, 23갈 3:28; 골 3:11; 행 2:47

9. 전도의 협력

신약 성경에는 전도와 연합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은 세상이 자신을 믿도록(요 17:20-21) 하기 위해 자신이 성부와 하나 됨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또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하며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빌 1:27)라고 했다. 이런 성서적 비전과는 달리 우리는, 서로 의심하고 대결하며,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고집을 부리고, 권력 투쟁과 자기 왕국 건설에 힘씀으로 복음 전도 사역을 부패시키고 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 우리는 전도에 있어서 협력이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확인한다. 첫째,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뿐 아니라 화해의 복음이 우리의 분열로 인해 불신을 받기 때문이며 세계 복음화 과제가 기필코 성취되려면 우리가 이 일에 함께 협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협력’이란, 다양성 가운데서 통일성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러 가지 다른 기질, 은사 그리고 문화, 지역 교회와 선교 단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함께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1세계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들이요, 제3세계는 선교를 받는 국가들이라고 단순하게 구분하는 분류법은 지난 식민주의 시대의 잔재이며 그런 분류는 영원히 지나간 것임을 단호히 밝혀둔다. 우리 시대에 있어 새로운 사실은 선교의 국제화이기 때문이다. 지금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대다수가 비서구인일 뿐 아니라 머지않아 제3세계 선교사의 수가 서구 선교사들의 수를 능가할 것이다. 구성에 있어서는 다양하지만, 마음과 정신에 있어 하나 된 선교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

우리가 ‘온 교회’라고 말할 때, 우주적․보편적 교회가 복음적인 공동체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는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많은 교회가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태도는 매우 다양하다. 복음주의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교회들과도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며, 성경 연구를 하고, 함께 일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들과는 어떠한 형태의 대화나 협력도 모두 반대한다. 이런 복음주의자들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심각한 신학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예를 들어, 성경 번역, 현안의 신학적․윤리적 문제들 그리고 사회사업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연구와 같이, 성경적 진리가 손상되지 않는 적절한 영역에서는 협력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전도할 때는 성경적 복음에 대한 같은 태도의 헌신이 요청된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싶다.

우리 중 일부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하는 교회의 성도들로서 그 협의회가 하는 일에 적극적이면서도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의무라고 믿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전도에 대해 철저한 성경적 이해를 채택하기를 촉구한다.

세계 복음화에 큰 거침돌이 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분열에 대해서는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대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계속 추구하며 나아갈 것을 결의한다. 좀더 밀접한 협력을 향해 나아가는 바른 길은, 우리와 같은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성경에 기초해서 솔직하게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쁘게 헌신한다.

요 17:20, 21; 빌 1:27; 빌 1:15, 17; 2:3, 4; 롬 14:1-15:2; 빌 1:3-5; 엡 2:14-16; 4:1-6; 엡 4:6, 7; 행 20:4; 요 17:11, 20-23

C. 온 세상

온전한 복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도록 온 교회에 위탁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보냄받은 이 세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0. 현대 세계

전도는 진공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복음과 상황 사이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유지하여야 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하지만 그러나 상황이 복음을 왜곡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과학 기술과 함께 산업화되어 가며, 경제 질서의 변화와 함께 도시화되어 가는 새로운 세계 문화의 출현이라는 ‘현대성’(modernity)의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되어 환경을 조성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게 한다. 더욱이 세속주의는 신앙을 황폐하게 해서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사실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도시화는 사람들의 삶을 비인간화하였으며, 대중 매체는 말을 영상으로 대체해 진리와 권위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현대화의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애써 전하는 메시지를 왜곡시키며, 또 선교에 대한 동기 유발을 해친다.

1900년에는 세계 인구의 9퍼센트만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에는 5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 살게 될 것이다.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이주’라고 불려 왔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 선교에 주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 한편, 도시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 민족이 우리의 문턱에까지 와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민족의 장벽을 허무는 우주적 교회들을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한편, 많은 도시 주민들은 가난한 이주민들이기 때문에 복음을 잘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와 같은 도시 빈민 공동체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들을 섬기며 도시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대화는 위험과 함께 축복을 가져오기도 한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통신망과 교역망을 통해, 전통적 사회든지 전체주의적 사회든지, 현대화는 복음이 미개척지 경계를 넘어 그 닫힌 사회 속에 파고들어 갈 수 있는 전대미문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기독교 매체들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나, 토양을 준비하는 일에나,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주요 선교 방송국들은 2000년까지는 모든 주요 언어로 라디오를 통해 방송 전도를 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는 현대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만큼 노력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현대적 방법과 기술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 인해 우리 자신이 세속성에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도전과 기회를 심각하게 다루어, 현대의 세속적 압력에 대항하고,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현대의 모든 문화와도 연관시키며, 현대 사회에서 세속화되지 않으면서, 현대 선교에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행 13:14-41; 14:14-17; 17:22-31; 롬 12:1,2

11. 주후 2000년도와 그 이후의 도전

오늘날 세계 인구는 60억에 육박하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 그리고 나머지 40억 중 절반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들었으며, 그 나머지 반은 듣지도 못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에 비추어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범주의 사람들을 고려함으로써 우리의 복음화 과제를 평가한다.

첫째로, 잠재적인 선교 역군으로 헌신된 사람들이다.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1900년에는 4천만이었는데 오늘날에는 5억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어떤 주요한 종교 그룹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둘째로,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고백한다(그들은 세례를 받고, 교회도 가끔 참석하며,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이란 개념은 생소하기만 하다. 이런 사람들은 전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 시급히 재복음화해야 한다.

셋째로, 비복음화된(unevangelized)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거리, 길, 마을, 촌락에 가면 만나 전도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넷째로, 미복음화된(unrached)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이 주되심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20억이나 되는데, 이들은 자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접촉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지 않다. 사실 약 2,000여 민족들 가운데서는 아직도 활발한 토착적인 교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 여기에서 ‘민족’이란, 서로 유사성(예를 들면, 공통된 문화, 언어, 가정, 직업)을 가진 종족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달자는, 이미 그들의 문화에 속하고 그들의 언어를 아는 신자들일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면, 다른 문화권에 속하는 복음의 사자들이 가야만 하며 이들은 자기의 문화를 떠나, 전도하려는 민족들과 자신을 동일화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2,000여 개의 큰 민족들 속에 그와 같은 약 12,000여 개의 미전도 종족이 있으며 그들을 전도한다는 과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전체 선교사의 겨우 7퍼센트만이 이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나머지 93퍼센트는 세계의 절반이 되는 지역, 곧 이미 복음화된 지역에서 일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불균형을 시정하려면 선교 인력을 전략적으로 재배치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범주의 선교에 있어서 한 가지 방해 요인은,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많은 국가들이 그 나라에 기여할 만한 일이 없으면 선교사로 입국하고자 할 때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지역들에 절대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휘장도, 문도,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라디오나 텔레비전, 오디오나 비디오 카세트, 필름이나 책자는 그런 지역에까지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스스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소위 ‘자비량 선교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들은 직업을 가지고서(예를 들면, 상인, 대학 교수, 전문 기술인, 어학 교사) 여행하며, 가능한 모든 기회를 이용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상 정당하게 가는 것이기 때문에 속임수를 써서 다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 그 자체로써 증거가 되기 때문에 전도는 자연히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거의 200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심히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주후 2000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도전적인 이정표가 되었다. 2000년 시대의 마지막 십 년 동안 세상을 복음화하는 데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날짜에는 마술적인 것이 있을 수 없지만,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과업은 긴급하다. 우리는 기쁨으로 희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을 다짐한다.

행 18:1-4; 20:34; 눅 24:45-47

12. 어려운 상황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반대를 예상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2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라고까지 말씀하시며(마 5:12)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요 12:24)을 상기시켰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불가피한 것이며, 고난이 열매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은 모든 시대의 진리였고, 우리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다. 오늘날의 상황도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글라스노스트’(glasnost)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가 소비에트 연방과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게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가져다주고, 회교 국가들과 힌두교 국가들도 복음에 대해 좀더 개방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는 최근 일어난 중국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잔혹한 억압에 대해 탄식하며, 그 억압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많은 고난을 가하게 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고대 종교들은 복음에 대한 관용에 있어서 더 인색해지며 추방된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세계는 복음에 대해 점차 냉혹해져 가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재고하는 정부들에 대해 아래의 세 가지 사항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안녕을 추구하는 충성스러운 시민이다. 그들은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며 세금을 납부한다. 물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해 온 사람들이 다른 권력자들을 주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거나 또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강요한다면 그 명령에는 불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적인 시민이다. 그들은 결혼 생활과 가정생활을 안정시키며, 그들의 업무에 정직하고 근면하며, 장애인과 곤경에 처한 자들을 돕는 일에 자발적으로 활동함으로써 국가의 안녕에 기여한다. 공의로운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을 경계할 필요가 전혀 없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에 있어서 비열한 방법을 거부한다. 신앙의 본질상 우리는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지만, 그 전도를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해서 복음을 듣는 이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결단하게 한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민감하길 바라며, 그들의 개종을 강요하는 어떤 방법도 거부한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에 대한 자유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갖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독교가 우세한 국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서 다른 소수 종교를 위해 자유를 요청하고 있다. 비기독교 국가의 그리스도인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종교인들을 위한 자유 이상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다. 세계인권선언(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 정의된 바대로, 종교를 ‘고백하고, 실천하고, 전하는’ 자유는 분명히 상호 인정할 수 있는 권리이며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비열한 방법으로 전도해서 죄를 지었다면, 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되지 않도록 어떠한 일에도 불필요한 공격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공격한다면 이를 회피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는 하나의 은총으로 고난도 받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잇기를 위해 기도한다. 순교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귀히 여기겠다고 약속하신 하나의 증거 형태다.

요 15:20; 마 5:12; 요 12:24; 렘 29:7; 딤전 2:1, 2; 롬 13:6, 7; 행 4:19; 5:29; 고후 4:1, 2; 고후 6:3; 고전1:18, 23; 2:2; 빌 1:29; 계 2:13; 6:9-11; 20:4

맺음말: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를 선포하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를 선포하라.” 이것이 로잔 2차 대회의 주제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음을 믿는다. 그분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황제였을 때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 그분의 약속대로 어느 날 그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영광 속에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초림과 재림 사이의 간격은 기독교 선교 활동으로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땅끝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주님은 그렇게 할 때 이 시대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두 가지의 마지막(곧, 시간과 공간의 우주적 종말)이 동시에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는 긴급한 과업이다. 우리는 선교를 위한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른다. 분명 허비할 시간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의무를 시급히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이 있는데, 특히 연합(함께 전도해야 한다)과 희생(복음화를 위한 대가를 알고, 또 치러야 한다)이 필요할 것이다. 로잔에서 우리는 온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계획하고, 일할 것을 언약했다. 마닐라에서 우리는 온 교회가 온 세상에 온전한 복음을 가지고 나아가 하나가 되어 희생적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긴급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눅 2:1-7; 막 13:26, 27; 막 13:32-37; 행 1:8; 마 24:14; 마 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