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선교학 연구는 대체로 유럽과 서구의 어휘와 언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선교의 역사가 주로 서구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선교를 중심으로 쓰이고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다중심 선교학의 함의를 고민하며 다수 세계의 선교에 주목하는 맥락 안에서 21세기 선교를 재구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어휘와 언어는 무엇일까?
나는 이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아프리카 언어, 어휘, 속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며 이를 신학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요루바(Yoruba)-나이지리아 청년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는 속어 중 하나가 자파(Japa)이다. 이는 도망치다, 달아나다, 혹은 미래를 위해 신속히 행동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 글은 자파라는 요루바 단어를 사용하여 영국에서의 선교와 이주의 교차점을 탐구하며 신학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파의 현실!
COVID-19 팬데믹 이후, 아프리카 대륙에서 새로운 이주의 물결이 일고 있다. 이 새로운 이주 물결을 요루바-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자파라고 부른다. 많은 나이지리아와 아프리카 청년들이 자국이 직면한 다양한 경제적 어려움을 피하거나,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더 푸른 초장이라 여겨지는 서구 국가들로 달아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패턴이 홍콩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관찰되고 있는데, 영국에 있는 한 홍콩 신학자는 이 상황을 Runology라는 용어로 정의하며, 홍콩 이민자들이 정치적 상황을 피해 도피하려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1 나이지리아에서의 자파는 주로 청년들 사이에서 발생하지만, 청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다른 연령층에서도 유사한 이유로 이주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파를 실현하는 경로로는 영국에서 필요로 하는 간병인 비자, 서구 대학에서의 유학, 그리고 기타 기회를 활용하는 방식 등이 있다.
지난 2년간, 나는 나의 어린 사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에게는 나이지리아에서의 미래에 대한 전망 때문에 어떻게든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절박한 소망이 있었다. 이러한 대화는 때로 매우 어려웠고,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많은 나이지리아 청년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좌절감에 대해 들을 때 그렇다. 둘째로, 팬데믹 이후의 글로벌 경제 위기로 인해 나이지리아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목격하면서 그렇다. 이 글로벌 경제 위기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팬데믹의 영향이 이미 존재하던 경제적, 정치적 어려움을 더욱 심화시키며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일부 사람들이 간병인 비자 제도를 통해 영국에 도착한 이후 겪고 있는 경험들이다1. 이들 중 일부는 제도 내의 중간 관리직의 착취로 고통받고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영국이 생각만큼 ‘더 푸른 초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매일 생존을 위해 힘겹게 싸우며 실망감에 직면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질문은, 자파가 서구로 이주하는 (복음의) 증인으로서 기여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나이지리아의 인적 자원에 대한 두뇌 유출의 한 형태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이지리아를 떠난 것은 독립기념일이었던 2004년 10월 1일이었다.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친구들, 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의 미래 전망이 밝았던 친구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휴가나 사회적 모임을 제외하고는 해외로 이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그들 중 일부는 사업을 잃거나 경제적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자원을 소진하여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로 이주했다. 내 의견으로는, 자파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청년 이주와 마찬가지로 대륙에 대한 두뇌 유출의 한 형태다. 아프리카 대륙이 미래에 경제적, 정치적 강국으로 부상하려면, 이를 실현할 잠재력과 비전을 가진 청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니엘과 히브리 소년들: 점령자들의 종인가, 아니면 이주하는 증인들인가?
두뇌 유출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성경 속 이야기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바벨론의 왕은 왕족과 귀족 중에서 일부 젊은이들을 강제로 차출하여 자신의 왕국을 위해 봉사하게 했다. 본질적으로, 당시 유다의 최고 인재들이 바벨론 왕의 통치를 위해 ‘식민화’된 셈이다. 우리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 왕에게 자신들의 재능과 봉사를 제공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본문은 유다의 최고 인적 자원이 점령자들에 의해 빼앗긴 두뇌 유출 문제를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이 본문은 또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주하는 증인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평화로운 저항과 영향력을 통해 바벨론 제국의 사상과 이미지를 흔들고, 여호와의 왕국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이 평화로운 저항은 다니엘이 바벨론 신들에게 바쳐진 왕의 진미를 먹지 않겠다고 거절한 것을 통해 나타났다. 또한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왕의 꿈과 더 우월한 제국에 대한 환상을 해석했으며, 여호와의 왕국만이 영원한 왕국임을 드러냈다.
디아스포라에서의 이주하는 증인들2
다니엘과 히브리 친구들의 식민화 과정을 통해 두뇌 유출이 발생했지만, 동시에 이주하는 증인들이 되었다면, 자파는 영국으로 이주하는 증인으로 기여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주하는 증인은 하나님께서 디아스포라라는 요인을 통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기독교적 대리인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헬라어 단어 ‘μαρτυρες’는 영어 단어 ‘martyrs’(순교자)의 어원이 된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증인이 되는 데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사도행전에서 스데반과 야고보의 죽음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교부 시대의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의 흩어짐을 통해서도 성취되었다. 스데반의 죽음은 신약 교회의 디아스포라적 증언을 촉진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행 11:19-20).
이 본문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는 스데반의 고통스러운 순교로 촉발된 믿는 자들의 흩어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디아스포라적 요소와 (복음) 증거의 교차점을 활용하여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점이 드러난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주하는 증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이루신다면, 자파가 두뇌 유출의 한 형태로 여겨지더라도, 신앙을 가진 이들이 영국으로 이주하는 증인들이 되는 잠재력이 될 수 있다. 스데반의 죽음이 흩어짐의 요인이 되었듯, 오늘날의 맥락에서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 경제적 어려움, 정치적 고난 등이 자파를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많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탈출하려는 청년들이 유럽에서 선교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이 겪은 고난, 역경, 경계성(liminality), 그리고 생존의 경험은 그들에게 희생을 이해하는 위치에 서게 한다. 이러한 경험이 그들의 신앙과 결합된다면, 이주하는 증인들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영국에 나이지리아 오순절교회 개척을 놓고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다. 회의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많은 나이지리아 청년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파 현상으로 인해 많은 청년을 잃었지만, 동시에 이 젊은이들이 오늘날 영국에서 새로운 선교사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서구로 이주하는 증인으로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주하는 증인들과의 협력
이 새로운 증인들이 효과적으로 사역하려면, 영국 교회들과의 문화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선교적 세력을 어떻게 환영하고 소속감을 형성할지 분별해야 한다. 특히, 난민과 망명 신청자들에게 적대적인 세속적 흐름에 맞서 우리의 환영에는 더욱 큰 노력을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교회 내에서 사회의 외국인 혐오(xenophobia)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방법은 단순히 그들을 환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우리는 환영에서 시작하여 소속과 통합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어떠한 모습일까?
환영은 환대의 첫걸음이며, 결코 최종 결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환영은 새로 온 사람들이 우리의 교제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공간과 맥락을 조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영은 단순히 주일 아침에 차와 비스킷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선다. 이는 새로이 이주하는 증인들이 우리의 교회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속감은 환영의 단계를 넘어, 새로 온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표현할 수 있는 공간과 맥락을 의도적으로 조성함으로써 그들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더 깊은 단계다. 환영이 편안함에 관한 것이라면, 소속감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이민자, 망명 신청자, 난민들은 교회에서 자신들의 어려움을 솔직히 나눌 수 있다고 느끼는가, 아니면 고정관념에 갇히거나 판단 받거나 오해받을 것을 두려워하는가? 교회의 새로운 이주하는 증인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직면하는 인종차별에 대해 소그룹 모임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소속감을 형성하는 과정은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단순히 새 사람들을 우리 중 하나로 인식하지 않고,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 특히 그렇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통합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교회의 새로운 구성원들, 특히 다른 나라나 소수 민족 출신인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낯선 이방인처럼 느끼지 않고, 우리 교제의 중요한 일원으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교회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함께하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난과 기쁨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소속감을 느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역동성에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아, 이주하는 증인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게 된다는 점이다.3
Endnotes
- Rev Chi-Wai Wu talked about ‘Runology’ in a presentation on Hong Kong migrants and their mission potential at a gathering of national senior church leaders called Intercultural Leadership Forum hosted at All Nations Christian College.
- Editor’s Note: See article Diasporas from Cape Town 2010 to Manila 2015 and Beyond by Sadiri Joy Tira in the Lausanne Global Analysis, March 2015.
- See article Decolonising mission: Jesus’s decolonial ethic of God’s Kingdom, Evangelical Focus by Israel Oluwole Olofinj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