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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이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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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본 입장문은 로잔 운동 산하 디아스포라 이슈 네트워크(Diasporas Issue Network)에서 작성했습니다. 주요 저자는 폴 시드너(Paul Sydnor, 미국/프랑스), 샘 조지(Sam George, 인도/미국), 진 우(Jeanne Wu, 대만/미국), 그리고 클렌 니라마호로(Clene Nyiramahoro, 르완다/케냐)이며, 2024년 6월에 작성되었습니다. 본 입장문은 TV 토마스(TV Thomas, 말레이시아/캐나다), 불루스 갈라디마(Bulus Galadima, 나이지리아/미국), 조엘 라이트 목사(Rev Joel Wright, 미국/브라질), 엘리자베스 음부루(Elizabeth Mburu, 케냐), 현 한나(Hannah Hyun, 한국/호주), 그리고 존 박(John Park, 한국/미국)으로 구성된 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Global Diaspora Network) 임원진의 많은 의견을 수렴하여 개발되었습니다. GDN NextGen 리더 중 일부가 추가 리뷰를 제공했습니다: Stephen Kim(한국/미국), Miho Buchholtz(일본), Fabiana Braun(브라질/독일), Minwoo Heo(한국/미국), Suhandy Wei Xuan Yao(인도네시아/싱가포르), Beatriz Tielmann(브라질/코스타리카).

서론

인간의 이주는 이방인, 외국인, 이민자, 외계인, 망명자, 유목민, 난민, 그리고 속박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이주의 모루 위에서 형성된다. 이 논문은 강제 이주와 관련된 다양한 용어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시작하여, 세계 강제 이주민들의 간략한 역사적 개관과 현재 상황을 제공한다. 그 다음 성경과 신학 문헌에서 강제 이주 문제를 추적한다. 마지막으로 강제 이주민들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효과적인 사역과 관련된 선별된 주제들을 제시한다.

용어 정의

강제 이주는 안전과 생존을 추구하여 고향과 출생 공동체를 떠나는 비자발적인 이동이다. 이는 생명을 위협하는 힘과 더불어 사람으로 하여금 이주하도록 강요하는 누적적이거나 갑작스러운 압력을 포함한다. 국내 실향민, 난민, 망명 신청자, 취약계층, 미등록자, 기후 난민 등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강제 이주민들이 있다. 국내 실향민, 난민, 망명자의 법적 지위를 결정하는 조건들은 잘 정의되어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이 논문은 광범위하게 이주를 강요당하고 법적 지위가 모호하며 어떤 형태의 보호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포함한다.

대부분의 강제 이주민들은 외부 또는 내부 강압의 조건 하에서 순전한 생존을 위해 이주가 일어나는 다양한 국경을 넘는다. 일부 강제 이주는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움직임의 결과이지만 대부분은 그들의 통제 밖의 수동적이고 비의도적인 사건들이다. 비록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지만, 한 종류의 이주민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종종 다른 형태의 이주를 간과할 수 있다. 이 논문은 ‘강제 이주민'(이하 FDP)이라는 용어를 광범위한 사람들과 조건들을 지칭하는 데 폭넓게 사용한다.

FDP들은 이민자, 이민 노동자, 결혼 이민자, 국제 학생, 디아스포라 공동체 등과 같은 다른 이동하는 사람들과 다르다. 이러한 집단들의 지리문화적 이주는 자발적인 반면, FDP들은 비자발적으로 이동하며 어떤 형태의 극심한 고통을 수반한다. 추가적으로, 국가들은 이러한 자발적 이민자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법과 법적 절차를 갖추고 있다. ‘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로잔 임시 논문(LOP) #70이 모든 형태의 인간 이동의 맥락에서 기독교 선교를 광범위하게 다루는 반면, 이 논문은 특별히 다양한 이유와 불리한 상황으로 인해 이동을 강요당하고 지위가 모호하지만 보호가 필요한 FDP들에 초점을 맞춘다.

국내 실향민 (IDP)

IDP라는 용어는 분쟁, 전쟁, 자연재해, 또는 경제적 붕괴로 인해 자국 내에서 피난을 강요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IDP의 핵심적 구별점은 그들이 국경을 넘지 않지만 지정학적 실체 내의 새로운 장소로 현재 거주지에서 이주를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 FDP 중 가장 큰 집단 중 하나이다. 기술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국민국가의 주권과 보호 하에 있기 때문에 – 비록 그것이 실패한 국가이거나 전쟁 지역일지라도 – IDP에 대한 국제법이나 규정은 없다. IDP들은 고통의 조건 하에서 실향되었고 국경 너머로 피난처를 찾을 자원이나 연결이 부족하기 때문에 FDP에 포함된다. IDP들은 그들을 보호해 줄 통치 기구나 법이 그들의 나라에 없기 때문에 취약하다. 이들은 사회경제적, 교육적, 직업적, 사업적, 가족적, 그리고 기타 이유로 자국 내에서 자발적으로 이주하는 국내 이민자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난민

난민들은 자국을 떠나 태어난 곳이나 시민권을 가진 곳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기 위해 국제 국경을 넘는다는 점에서 IDP와 다르다. 사람들이 박해나 살해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두려움으로 인해 출생국을 피할 때, 그들은 1951년 제네바 협약과 다른 보완적 보호 형태 하에서 보호받을 자격을 갖는다. 난민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제네바 협약 제1조의 다음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a) 충분한 근거가 있는 두려움이 있어야 하고, b) 다섯 가지 이유 중 하나 –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 또는 정치적 의견 – 때문이어야 하며, c) 다른 곳에서 보호를 찾을 수 없고, d) 생명의 위험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두려워해야 한다. 이 좁은 법적 정의에 맞음을 문서화하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은 공식적인 난민 지위를 받을 수 있다. 때로는 ‘협약 난민’이라고 불리며 강제로 실향된 사람들 중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망명 신청자

망명 신청자는 다른 나라에서 보호를 위한 신청을 제출하거나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다른 나라에 도착한 개인이다. 이 용어는 또한 그 국가가 신청에 대해 결정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모든 망명 신청자가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난민은 처음에는 망명 신청자이다. 대부분의 난민과 망명 신청자들은 주로 비경제적 이유로 이동하며, 전쟁, 분쟁, 폭력, 박해, 집단학살,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생존 위협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히거나 원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보호 승인은 박해나 위험에서 피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가 자국 영토에서 주는 것이다. 망명자 지위는 송환 금지, 망명국에서의 체류 허가, 그리고 인도적 대우 기준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포괄한다.

취약계층

정책 문서와 법률에서 언급되는 취약계층에는 무국적자,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자, 인신매매 피해자 등이 포함된다. 그들은 ‘관심 대상자’로 여겨지며 FDP와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 그들의 거주지에서 법적 지위나 소속이 없는 동안, 그들은 매우 취약하며 보편적 인간 존엄성에 기초하고 부당한 정치적, 사회경제적 법과 관행으로부터의 보호에 기초한 보호가 필요하다.

기후 난민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인해 집, 공동체, 또는 국가를 떠나도록 강요받을 때, 그들은 기후 난민이 된다. 그들은 국가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자국 내에 머물거나 다른 나라에서 안전과 생계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을 수 있다. 그들은 또한 환경 난민이나 날씨로 인한 이민자라고도 불린다. 이는 지구 온난화, 산불, 삼림 벌채, 사막화, 자연재해, 기근, 가뭄, 연안 홍수, 쓰나미, 가라앉는 섬들, 빙하 용해, 불규칙한 날씨 패턴, 지진, 화산 폭발 등으로 인한 더 최근의 그리고 증가하는 글로벌 현실이다. 이러한 조건들의 증가되고 반복되는 발생은 이전보다 더 큰 치명률과 경제적 영향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생계의 상실을 야기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계에서 더 거주하기 좋은 곳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한다. 기후 난민이라는 용어가 1985년부터 사용되었지만, 이 조건이 다른 모든 이주 원인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순전한 생존을 위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할 예정이기 때문에 21세기의 초위기로 간주된다.

미등록자

공식 서류 없이 국가에 입국한 사람들과 한 나라에서 등록되지 않고 승인받지 않은 채로 거주하는 사람들을 미등록자라고 한다. 이는 공식적이거나 법적 용어는 아니지만, 망명 신청자로 등록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출생국에서 극심한 경제적 조건을 피해 온 사람들을 포함하여 망명 시도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포괄한다. 그들은 때때로 수용국에서의 은밀한 여행과 불분명한 지위 때문에 ‘비정규’ 또는 ‘불법’ 이민자라고 불린다. 그들은 인간 밀수업자와 같은 비공식적 경로와 승인받지 않은 수단을 사용한다. 이것이 그들이 불법자, 외계인, 또는 다른 경멸적 용어로 불리는 이유이다. 기술적으로 사람들이 망명과 보호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있으며, 이러한 사례들이 법에 따라 검토되기까지는 그 사람이 불법적이지 않다. 미등록 지위는 이러한 FDP들의 복잡한 과정과 혼합된 동기를 반영한다. 한 사람은 난민으로 이동하기 시작할 수 있지만 그다음 서류 없이 여행하고 레이더 아래에서 머물도록 강요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결정으로 시작된 것이 위험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조건에서 생존하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변할 수 있다. 정규 이민자와 미등록자 사이의 구별은 표면적으로는 어렵고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그것은 주로 법적 서류, 수용 사회에서의 인정, 취업 허가, 의료 서비스 접근, 그리고 공식적 정착이나 시민권을 향한 가능한 경로에 달려 있다.

기타 용어

위의 FDP 하위 범주들 외에도, 일부 다른 사람들은 강제 이주와 유사하지만 매우 다른 조건들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구금자, 추방자, 대피자, 불법 외국인, 비자 초과 체류자, 귀환자, 송환자, 승인받지 않은 이민자의 자녀, 밀수되거나 인신매매된 사람들, 성 노예, 채무 노예 등이 포함된다. 종종 다른 곳에서 보호를 찾기 위해 피하는 모든 FDP들이 부담으로 여겨지고 언론에서 경멸적으로 묘사된다. 그들의 상황을 정의하거나 파악하는 어려움 때문에 그들은 낙인찍히고 비인도적으로 대우받는다. 그들은 인종, 성별, 종교, 또는 출신국에 기초한 차별에 직면한다. 그들은 종교를 실천하고 자녀들에게 종교 교육을 제공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 FDP들은 또한 그들이 이주한 나라의 법과 규정뿐만 아니라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 UNHCR이 그 협약 규정들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비준수를 감시할 공식 기구들이 없고 개인들이 불만을 제기할 공식적 메커니즘도 없다.

FDP들이 법적 지위를 갖지 못할 때, 그들의 상황을 낙인찍고, 표시하고, 고정관념화하고, 오해하기 쉽다. 강제로 이주한 사람들은 자국을 떠나기로 선택하고 이주를 위한 특정 단계를 따르며 그들의 수용국에서 다르게 인식되는 다른 이민자 집단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다른 모든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처럼, 그들의 이주 이야기는 21세기 글로벌 기독교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체성 투쟁, 타자화 경험, 그리고 여러 지리문화적, 언어적 연결을 유지하면서 미래 세대를 양육하는 것을 형성한다.

H역사적 맥락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1948년 유엔 총회는 모든 인간의 기본권을 규정하는 세계인권선언을 승인했다. 이 기준들 중에는 자유로운 이동의 권리, 망명을 신청할 권리, 그리고 자의적 체포나 구금으로부터의 보호를 포함한 평등, 자유, 안전에 대한 권리가 있다. 1951년 제네바 협약과 1967년 의정서는 난민에 초점을 맞추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난민의 정의와 그들의 보호를 확립했다. 이러한 합의의 핵심 원칙은 사람들이 위협에 직면할 수 있는 나라, 특히 분쟁이나 박해를 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돌려보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추가 조약들과 함께, 이러한 문서들은 국가들에게 인도주의적 가치에 기초하여 난민 지위를 결정하고 인간 이주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안내하며 난민 여행 문서 소지자들에게 비자 없는 여행을 제공하는 법적 기초를 주었다.

1969년 아프리카 연합 협약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협하는 다른 요인들을 다룸으로써 난민 보호의 기준을 확장했다. 환대는 아프리카적 대응의 뿌리에 있었지만, 지역 내 대규모 실향민들은 개별 국가들이 대처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1984년 카르타헤나 선언은 생명, 자유, 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추가적 상황들을 포괄하도록 정의를 확대했다. 그것은 IDP들의 곤경, 망명권, 송환 금지 원칙, 그리고 가족 재결합을 강조한다. 이러한 지역적 대응들은 좁고, 개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기술적 정의들에 대한 제네바 협약의 한계를 강조한다. 그들은 이제 비정규 및 미등록 사람들을 포함한 광범위한 실향민들로 특징지어지는 FDP들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2020년 현재, 146개 회원국이 위의 난민 협약들과 이러한 문서들에 명시된 의무들을 비준했다.

세계가 계속해서 국경을 다시 그리고 정부를 재구성함에 따라, 인간 이주와 관련된 문제들이 상당히 증가했다. 세계복음주의연맹은 다양한 기독교 조직들과 사역들을 불러모아 난민들의 필요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2001년 터키 이즈미르에서 “우리가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함께라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난민 협의회를 위해 모였다. 강제 이주 상황에서 섬기는 기독교인들을 돕는 방법으로 ‘난민 사역의 모범 사례’를 초안했으며, 이는 나중에 2015년에 개정되었다. 그 이후로 난민 고속도로 파트너십(RHP)과 같은 다양한 네트워크와 사역들이 전 세계적으로 발전했으며, 전인적 돌봄을 증진하고, 세계 교회가 난민의 필요에 응답하도록 교육하고, 난민들을 위해 옹호하기 위해 다른 대륙들에서 지역 네트워크들을 가지고 있다. 난민들과 그들 가운데서의 사역들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을 높이기 위해, WEA와 협력하는 RHP는 매년 6월의 한 주말을 세계 난민 주일로 지정하고 전 세계 회중들을 위한 다양한 자료들을 개발했다.

로잔 세계복음화위원회(당시 로잔 운동이라고 불렸던)는 2004년 태국 파타야에서 글로벌 포럼을 개최하고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국제 학생들에 대한 ‘새로운 이웃들'(LOP #55)이라는 제목의 입장 논문을 개발했다. 같은 행사에서 또 다른 논문은 난민들에 초점을 맞춘 ‘위험에 처한 사람들'(LOP #34)이었다. 이전에, 다른 입장 논문이 1980년에 열린 미니 협의회에서 로잔에 의해 만들어졌고 특별히 ‘난민들에 대한 기독교적 증언'(LOP #5)에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문서들은 전 세계 난민들 가운데서의 사역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강제 이주 문제는 지난 20년 동안 눈에 띄게 증가하고 더 복잡하고 글로벌해졌기 때문에, 세계 실향민들에 대한 복음주의적 이해에 기초한 더 세밀한 입장 논문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모든 종류의 인간 이주는 전 세계적으로 현대 기독교의 전파와 형성에 전략적 장기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 수십 년과 세기 동안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강제 이주 문제에 관여하는 주목할 만한 네트워크는 로잔 운동의 공식 이슈 네트워크인 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GDN)로, 2010년 창립 이래 경제적 이민자, 국제 학생, 난민이라는 세 가지 주요 초점 영역을 가졌다. GDN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주요 지역에서 매년 주요 지역 및 글로벌 협의회를 소집했으며 항상 다양한 FDP 집단들을 포함했다. GDN은 글로벌 이주와 다양한 디아스포라 공동체들과 관련된 선교학적, 신학적 렌즈를 사용하여 광범위한 출판물들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GDN은 이민자 선교, 디아스포라 선교, 그리고 디아스포라 선교학을 전 세계적으로 신학교 교육과 선교 훈련의 전면에 가져왔고 전 세계 이민자, 난민, 그리고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을 위한 사역들과 리더십 훈련을 촉매적으로 촉진했다. GDN은 사역 지도자들을 가상으로 연결하고 지원하기 위해 GMove라는 모바일 앱을 개발했다.

현재의 현실

2010년 케이프타운 로잔 대회는 ‘이동하는 사람들’을 세계 교회의 전략적 선교 초점 영역으로 확인했다. 이는 예언적 부르심이었으며 그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이주와 난민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인간 이주는 세계적 문제가 되었다 – 국경을 초월하고 대규모로 인류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도전 – 그리고 앞으로 수십 년간 하나님의 선교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난 10년 정도 동안 미얀마, 중앙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에티오피아, 수단, 시리아 아랍 공화국, 그리고 최근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의 전쟁과 분쟁으로 수백만 명이 실향되었다. 이에 더하여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브라질, 필리핀, 콜롬비아에서의 주요 환경 및 날씨 관련 재해들과 터키와 북시리아에서의 거대한 지진들이 있다. 함께 이것들이 오늘날 인간 이주의 주요 핫스팟을 구성한다. 호주, 북미, 유럽의 화재와 홍수들이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집에서 쫓아냈다.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섬들이 가라앉거나 완전히 인구가 감소했고, 인도양의 쓰나미들이 수백만 명을 고지대로 이주하거나 해외에서 피난처를 찾도록 위협했다. 베네수엘라 경제의 붕괴로 전체 인구의 거의 5분의 1이 해외로 나가게 되었고 사람들이 하루 평균 2000명의 비율로 계속 떠나고 있다. 추가적으로, 이주의 혼란과 불확실성이 유럽과 북미로 이동하는 인간 대상들의 통로를 따라 주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FDP를 수용하는 상위 국가들이 대부분 글로벌 사우스에 있고 유럽이나 북미에 있지 않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23년 말 현재 전 세계에는 총 1억 1,730만 명의 FDP가 있었다. 이는 IDP(6,830만 명), 난민(3,760만 명), 망명 신청자(690만 명), 무국적자(95개국에서 440만 명), 그리고 국제적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580만 명)로 구성된다. FDP의 약 40%(4,700만 명)는 18세 미만의 아동이며, 지난 5년간 300만 명의 아이들이 난민으로 태어났다. 난민의 73%는 단 5개국에서 왔다: 아프가니스탄(640만 명), 시리아(640만 명), 베네수엘라(610만 명), 우크라이나(600만 명), 그리고 남수단(230만 명). 대부분의 FDP들은 이란(380만 명), 터키(330만 명), 콜롬비아(290만 명), 독일(260만 명), 그리고 파키스탄(200만 명)과 같은 인근 국가들에서 수용되었다.

UNHCR은 FDP를 위한 세 가지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a) 고향으로의 귀환, b) 제3국으로의 재정착, 또는 c) 수용국에서의 체류와 귀화.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러한 해결책 중 하나를 찾는다. 2023년에는 난민의 1% 미만만이 새로운 나라에 재정착할 수 있었다. 대다수 – FDP의 75% -는 가난하거나 중간 소득 국가들에서 수용되며, 가장 덜 발달된 나라들이 2023년에 FDP의 21%를 수용했다. 120만 명의 난민이 그들의 출신국으로 돌아갔고 158,700명이 2023년에 다른 나라들에 재정착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강제로 실향된 사람들의 이미지는 절망적이고, 희망 없고, 불법적이고, 무력하고, 미개하고 교양 없으며, 심지어 자격 없고 폭력적인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FDP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자신들을 위해 결정을 내릴 수 없으며, 그들의 수용 공동체들로부터 귀중한 자원을 빼앗는 개인들로 묘사한다. 그것은 FDP들이 무능하며 다른 사람들의 호의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잘못 제시한다. 이것들은 진실과 거리가 먼 신화와 거짓말들이다. FDP들 자신은 그들의 꿈이 산산조각 났고 모든 소속감을 잃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마음속에 머무는 질문은 ‘집이 어디인가? 이 하루를 어떻게 버텨낼 것인가?’이다. 그들은 목소리를 잃었고 그들에 대해 다양한 가정을 가질 수 있는 인도주의 기관들의 자비에 맡겨져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자신들을 FDP들에 대한 전문가로 여기지만 그들에 대한 신화를 퍼뜨릴 수도 있다.

그 결과, 수백만 명의 FDP들이 전 세계 난민 캠프에서 소멸하고 있다. 재정착되든 난민 캠프에서 살든, FDP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복잡한 외상과 절망. 만약 우리가 그들이 안전하게 그것을 다루도록 돕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낙심하고, 지치고, 외상을 받을 것이다. 어떤 지속적인 해결책도 찾기 어렵다. 작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여 2023년 상반기에 해결책을 찾은 FDP들의 수가 증가했지만, 지속적인 해결책이 거의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세계 교회는 이 증가하는 위기에 관여할 수 있고 관여해야 한다.

미래의 로드맵

FDP 사역은 모든 사람이 어렵고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을 통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지도가 필요하다. 성경은 확실히 지도를 방향 설정하는 나침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각각의 새로운 세대와 이주 시대와 함께, 로드맵은 그 길을 따라 새롭고 오래된 이정표들과 함께 다시 그려져야 한다. 이주 지도의 이정표들 중 일부는 상실의 장소, 회복, 소속감, 유배 감성, 친구와 이방인으로서의 사람들, 또는 민족성과 자기중심주의의 문화들을 포함한다. 우리가 이러한 이정표들 중 어느 것을 주장하는 정도는 우리가 FDP들을 이해하거나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투쟁하는 정도를 나타낸다.

종종 교회는 강제 이주에 영향받은 사람들의 문제와 필요를 이해하는 데 뒤처진다. 변화나 새로운 것에 직면했을 때의 기본값은 이전과 같은 접근법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문화의 새로운 이웃들을 환영하거나 우리 지역 교회에서 새로운 신학적 기초와 사역 접근법을 개발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실향민들 가운데서의 사역은 다른 필요와 도전을 가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에 적절한 선교 접근법이 필요하다. 우리는 적극적인 청취자가 되고 그들의 독특한 상황을 위해 사역을 상황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겸손한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같은 관점을 채택해야 한다. 글로벌 노스로 오는 사람들 중 일부는 최근 몇 년 동안 기독교가 성장한 글로벌 사우스의 장소들에서 와서 지금 신앙이 쇠퇴하고 있는 곳들에 부흥의 새로운 불을 가져오고 있다.

난민들은 길 위의 여행자들이며,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잠재적 매개체이자 대사들이다. 폭풍과 위험들은 그들의 인생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이 지도에서 교회들은 안전과 소망으로의 길을 보여주는 등대와 같다. 교회와 그 사람들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파수꾼과 같다. 그들은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근원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그들의 여행에서 난민들, 망명 신청자들, 그리고 다른 FDP들을 통해 보내시는 생명과 메시지를 그들 자신이 크게 필요로 한다. 이러한 만남의 윤곽과 경계는 FDP들과 함께하는 축복과 고난을 모두 공유한다.

토지가 구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처럼, 이주 또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움직이시는 방식을 아는 데 중요하며, 강제 이주는 위험을 높인다. 월터 브루게만은 성경 신학에서 토지에 대한 그의 논문 첫 페이지에서 말한다: “길을 잃고, 실향되고, 집이 없다는 감각은 현대 문화에서 설득력이 있다. 어딘가에 속하고, 집을 갖고, 안전한 곳에 있고자 하는 갈망은 깊고 감동적인 추구이다.” 길을 따라 있는 모든 사람은 이주의 지도를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회는 다른 맥락에서처럼 이 지도를 이해할 수 없으며, 종종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 일을 깨닫기 위해 이 지도를 반복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의 한 가지 관심사는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이동하는 실향민들 가운데서의 그들의 역할을 고려하는 것이다. 지원을 가져오기 위해 마련된 정책들과 전략들은 또한 실향민들이 지원에 의존하는 것으로 묘사되면서 그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조장할 수 있다. 그들은 부담 분담의 필요성을 언급하여 실향민들이 다른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짐을 가져온다는 인상을 준다. 확실히, 사람들이 외상을 받고 존엄성과 생활 필수품을 박탈당했을 때, 져야 할 부담들과 충족해야 할 필요들이 있지만, 인간으로서 그들의 사회에 대한 기여는 우리 모두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회복력, 희망, 혁신, 그리고 기업가 정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져온다.

강제 이주의 경험들

보고서들과 이야기들은 강제 이주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다음 다섯 범주는 이러한 경험들을 광범위하게 요약한다. 이들은 근본 원인들을 반영하고, FDP 경험의 범위와 복잡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경험이 고통과 어려움을 만들어내지만, 또한 그 사람의 창의성과 회복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주에서의 각 개인의 경험은 종종 성경에서 평행선을 찾는다.

절망과의 대처

FDP들은 신체적 피로, 재정적 어려움, 교육과 직업의 상실, 부패, 그리고 실행 가능한 선택지의 부족이라는 일상적 스트레스를 헤쳐 나간다. 그들은 많은 문제들과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긴장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매일 그들은 차별, 박해, 문화적 지뢰밭, 상충하는 신념, 그리고 괴로운 양심에 직면한다.

한 젊은 여성이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시위 집회를 지나가며 친구들을 만났다. 아무 생각 없이 그 그룹은 집회에서 자신들의 사진을 온라인에 올렸다. 며칠 후 경찰이 시위와 연결된 사람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어느 저녁 당국이 그녀의 동네를 수색할 때,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뒷문으로 내보내고 나라 밖으로 보내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혼자서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에 대한 대안이나 아이디어 없이 있게 되었다. 그녀는 길 잃은 양과 같아서 하나님께서 그녀의 말을 들으시고 도움을 보내주실 분을 보내달라고 기도한다. 그녀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혼자 사막으로 도망간 하갈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보시고 샘물가에서 그녀를 찾아 치유를 가져다주는 천사를 보내신다. 하갈은 “나를 보시는 이를 내가 여기서 뵈었구나”(창 16:13)라고 고백한다.

폭력과 죽음에 직면하기

FDP들은 전쟁 지역, 폭력,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조건들에서 피한다. 그들은 취약성과 무력감의 무인지대에서 살며 림보 상태에서 영구적으로 기다리고 있으며 불확실성이 그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 수천 명이 사막을 가로지르는 위험한 여행을 시작하고 부적절한 배로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다 익사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 생존자는 “위험은 어려운 부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이것에 익숙해집니다. 어려운 부분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는 제자들이 폭풍 가운데 있었던 마가복음 4:35-41과 같다. 그들은 예수를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했다. 예수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느냐?”라고 물으셨다. 이는 분쟁과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 난민들에게 관련된 이야기이다. 많은 난민들이 “예, 주님, 주님께서 제 생명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저는 여전히 매일 두려워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의 소망은 폭풍 가운데 온다는 것을 알기 위해 전 세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증언들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생명을 위협하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사막에서 다윗을 격려한 요나단과 같은 친구로서 그의 백성을 보내신다(삼상 20:3-16).

외상과 수치와의 대처

강제 이주의 경험을 외상과 수치를 다루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외상은 복합적인 정신사회적 상황, 복합된 스트레스, 보호의 상실, 안전과 복지의 부족, 개인적 낙심, 위험, 후회, 무력감, 두려움, 환멸, 그리고 자살 충동으로 나타난다. 많은 실향민들은 벽과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에서 끝난다. 이러한 장벽들은 그들을 다른 공동체들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들의 고립과 외상, 그리고 종종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향민들은 건드리기 불가능해 보이는 그림자 같은 분리의 벽들과 함께 오랫동안 산다. 그것은 극복해야 할 수치의 벽이다.

예수는 요한복음 4:1-29에서 우물가의 여인과 많은 장벽을 건드렸다. 예수는 그녀가 혼자 고립되어 있을 때 우물가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지만 존중을 보였다. 그는 그녀의 질문을 들어주었고 그녀가 신뢰를 쌓고 그가 메시아임을 인식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주었다. 만남으로 변화된 그녀는 자신의 마을에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고 선포했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의 동네 안에서 실향되고 소외된 사람의 수치의 벽을 넘어서셨다.

존엄성을 위한 투쟁

이는 차별과 편견에 맞선 투쟁이다. FDP들은 학대, 체포, 기만, 감금, 그리고 조작을 견딘다. 때로는 비인간적이며 점차적으로 그들의 존재감을 갉아먹는다. 한 상황에서 모든 소유물을 잃고 도랑에서 살게 된 한 남자가 있었다.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그들이 나를 그들의 땅에서 쫓아냈지만, 아무도 나를 만드신 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정의의 임함에 대해 말하며 “내가 주렸을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언제 우리가 주님을 이렇게 보았나이까?”라고 대답했다(마 25:31-40). 하나님의 나라는 비전의 문제이다. 예수는 종종 그의 추종자들에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종류의 사역은 소망을 가져오고 하나님이 우리가 거기 도착하기도 전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깨달음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지만,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가 세상에서 역사하는 것을 보고 있는가?

이주 경험의 세밀한 차이

FDP들의 이야기는 많은 고통스러운 과거, 현재의 곤경,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포함한다. 그들은 복잡한 고난을 포괄하지만 정신적 강인함, 감정적 회복력, 문제 해결, 정의감, 인내하려는 결단, 그리고 저항하는 용기와 같은 긍정적 특성들을 강조한다. 이주 경험의 현실은 미묘하다. 국경을 건너는 FDP들의 집단은 그들의 여행에 대해 다른 이유들을 가질 것이지만 공통된 경험을 공유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세상에서 죄의 영향과 평행선을 그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길을 잃은 타락한 인류를 묘사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이주 상황에 은혜와 구속을 가져와서 자신을 위한 나라와 백성을 세우시는지를 추적한다. 많은 FDP들은 그들이 성경의 이야기들에서 자신들을 본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이주의 경험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목적이 그들의 지상적 이주를 통해서 역사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구속적이 된다. 그들은 모든 이주를 의미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신적 존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으로 본다.

성경 속의 강제 이주민들

어떤 형태의 이주는 기독교 성경의 페이지 전체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매우 만연하여 이주가 성경의 거대한 주제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 등장인물들, 줄거리들, 서사들, 배경들, 원저자들, 그리고 독자들은 모두 한 지리적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의 많은 다른 종류의 이주들의 맥락 안에서 틀지어져 있다. 이주의 주제는 구약과 신약 전체에 걸쳐 중요하며, 그것은 성경 서사에 깊이 짜여져서 개인들, 가족들, 그리고 나라들의 신적 계시와 변화를 위한 촉매 역할을 메타서사로서 제공한다. 이러한 이주들 중 일부는 압제, 어려움, 신적 개입, 그리고 궁극적 구속의 포괄적 계획 안에서 비자발적으로 또는 강제로 일어났다. 이 섹션에서 이주의 단어들은 이탤릭체로 강조되어 있다.

구약의 주목할 만한 FDP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신적 처벌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창 3:23-24). 가인은 그의 형 아벨을 살해한 후 땅을 방황하도록 저주받아 공동체, 필수품, 그리고 안전 없이 떠나게 되었다(창 4:12-14). 대홍수가 지구를 멸망시킬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거대한 배를 지어 그의 가족과 모든 생물 한 쌍을 구원하도록 지시하셨고, 본질적으로 그들이 몇 달간 물 위에 떠 있도록 강요하셨다(창 6-9). 바벨탑에서 인류는 지구 전면에 강제로 흩어졌다(창 11:8-9).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함께 갈대아 우르의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곳으로 여행하여 외국 땅에서 유목민으로 생활의 대부분을 살았다(창 12:1-2). 이집트 여종 하갈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주었지만 여주인 사래에 의해 쫓겨났고 나중에 가정의 긴장과 괴롭힘 때문에 도망쳤다(창 16:6-8).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해야 했고(창 28:2-5), 나중에 땅에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이주하도록 강요받았으며, 그곳에서 그의 후손들이 새로운 바로 밑에서 노예가 되었다(창 46:1-7). 요셉은 미디안 상인들에게 이복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고(창 37:23-28), 그곳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얻었지만 주인의 아내에 의해 거짓 고발당하여 감옥에 던져졌다(창 39:16-20). 율법과 선지자들은 약속의 땅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사랑과 환대를 강조했다: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었음이라”(레 19:34).

가장 중요한 예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세기 동안 이집트에서 속박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구원자를 보내어 그들을 구출하셨고,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 수십 년간 사막을 방황했다는 것이다(출 1-5). 도피성의 법은 재판을 받을 때까지 살인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이 조항은 그 땅의 나그네거류민들에게도 적용되었다(민 35; 신 19; 수 20). 기근에 직면했을 때, 나오미는 모압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받았고,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으며, 나중에 다윗과 메시아의 혈통에 속하게 된 외국 태생 며느리 중 한 명과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왔다(룻 4:17).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통치 기간 동안, 다윗은 사울의 질투와 두려움으로 인한 살해 시도를 피해 외국 땅과 적대적 부족들 사이에서 숨어 도망해야 했다(삼상 21-26). 다윗은 질투와 두려움으로 그의 생명을 찾는 사울로부터 반복적으로 피했을 때 하나님께 피하는 것에 대해 노래했다(시 7:1, 11:1, 16:1, 31:1, 46:1, 그리고 다른 곳들). 시편 기자는 기억했다: “우리가 소수이며 거류민이었고 그 가운데 나그네였을 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 왕국에서 저 백성에게로 방황했었도다…”(시 105:12-14). 예루살렘 성전은 외국인들의 도움으로 건축되었고(대상 22:1-2), 솔로몬은 땅의 모든 외국인들을 인구 조사하여 그들에게 일을 할당했다(대하 2:17-18). 북왕국 이스라엘 열 지파의 주민들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 제국에 의해 패배하고 추방되었다(왕하 17:5-6). 나중에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유배되어 페르시아의 정복이 그들의 귀환을 허용할 때까지 포로로 살았다(왕하 25:11; 렘 52:28-30). 유배는 유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그들의 정체성, 성경, 그리고 신학을 깊이 형성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이동했다. 사무엘은 그가 살고 이스라엘을 판단한 라마와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 언약궤가 보관되었던 실로 같은 다른 중요한 장소들 사이를 오갔다. 이사야의 예언 사역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다 백성과 주변 나라들을 향해 이루어졌지만, 예레미야는 웅덩이에 갇혔을 때 강제 이주에 직면했고, 나중에 바벨론이 임명한 총독 그달리야의 암살 후 보복을 두려워하여 도망한 유다 반역자들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반대로 이집트로 끌려갔다(렘 38:6). 에스겔의 사역은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일어났다(겔 1:2; 왕하 24:10-18). 요나여행이 가장 극적이다. 하나님이 그를 니느웨로 보내셨을 때, 그는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갔고 초자연적 개입을 통해 마음이 내키지 않는 선지자로 하여금 도시 전체의 부흥을 이끌도록 경로를 바꾸도록 강요받았다(욘 1-3). 모든 예언 사역은 그들이 다양한 부족들과 관여하고, 적대감에 직면하고, 그들의 시대의 복잡한 지리문화적, 정치적 풍경을 헤쳐나가면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어려운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요구했다.

신약에서도 강제 이주의 주제

특히 예수의 지상 사역과 초기 교회가 로마 제국의 배경에서 일어났음을 깨달을 때 신약에서도 강제 이주의 주제를 볼 수 있다. 복음서는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의 인구 조사를 위한 로마 칙령의 여파에서 예수의 탄생을 위치시키며, 이는 그의 부모들이 고향 베들레헴을 방문하도록 요구했다(눅 2:1-3). 예수 탄생 직후, 요셉은 꿈에서 베들레헴의 모든 유아들을 학살하려는 왕의 칙령을 피해 마리아와 아기 예수와 함께 이집트로 피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들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 이 이웃 나라에서 난민으로 살았다(마 2:13-15). 복음서들은 예수를 로마의 권력과 경제 구조에 대한 이해에 미묘하고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분으로 제시한다. 예수의 잘못된 유죄 판결과 십자가 처형에 의한 죽음은 로마 관리들의 손에 일어났다. 예수는 팍스 로마나의 약속과 반대로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의 전령자로 묘사된다.

요한을 제외한 예수의 모든 제자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살해당했다. 흩어진 자들은 어디든지 가서 말씀을 전했다(행 8:4). 1세기에 복음이 전파된 방법 중 하나는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신자들의 경우처럼 비자발적으로 흩어진 신자들을 통해서였다(행 11:36).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서 구금되고 재판받는 동안 로마의 압제 하에 살고 있는 실향된 소수민족들에게 편지를 썼다(벧전 1:1). 야고보서는 ‘여러 나라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보내어졌다(약 1:1). 사도 바울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산물이었으며, 그의 사역과 저술의 대부분은 분쟁, 반대, 난파, 체포, 감금을 포함한 광범위한 여행에서 나왔고, 결국 로마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상속받은 신앙에 대한 잘못 배치된 열정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극적인 만남이 그의 삶, 사역, 그리고 저술을 깊이 형성했는데, 이는 그를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산물로 보지 않고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 새로 형성된 흩어진 공동체들에 대한 그의 모든 편지들은 초기 기독교 독자들이 제국의 조건 하에서 살고 있던 사회경제적이나 정치적 권력 없는 박해받는 소수민족이었기 때문에 디아스포라적 감수성으로 읽고,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책은 저자(요한)가 로마의 형벌 식민지인 밧모로 강제 유배되어 있는 동안 쓰여졌으며, 그는 강제로 이주된 독자들에게 황제 숭배에 저항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굳건히 서라고 격려하면서,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그들이 정당함을 입증받을 것임을 알라고 했다(계 7:9).

신학적 주제들

이주는 선교의 개념에 중심적이며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을 나타낸다. 강제 이주는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의 본질을 보여준다. 성경이 이주의 다양한 차원들에서 전개되는 것처럼, 그들은 또한 기독교 교리의 본질적 측면들을 이주의 개념에 연결한다. ‘이동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들이 움직이는 용어들로 개념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환대, 샬롬, 유배, 회복, 이방인 사랑, 기억, 슬픔, 애가, 고난, 그리고 소망과 같은 강제로 실향된 사람들과 특별히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있다. 이 논문의 이 섹션은 이주와 밀접한 연결을 유지하는 기독교 신학의 몇 가지 본질적 주제들을 확인하지만, 또한 이주에 대한 이해가 신앙의 핵심 교리들에 어떻게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논증한다.

이주의 다양한 차원들은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에덴동산에서의 타락과 추방은 움직이는 인류의 핵심 기초를 확립한다. 아브라함과 같은 조상들에게 주어진 여행의 부르심은 믿음의 역할을 발전시킨다. 이집트로부터의 출애굽과 피난은 과거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인식, 미래 약속에 대한 소망, 그리고 현재의 일상적 투쟁에 기초하여 세워진 정체성의 언약적 측면들을 소개한다. 이는 현대 FDP들이 직면하는 딜레마를 적절히 설명한다.

바벨론과 앗수르에서의 유배 기록은 회복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과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더욱 설명한다. 이 세상에서 구속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이방인으로 오신 예수의 오심. 예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동하셨고 심지어 이집트에서 잠시 난민으로 사셨다. 예수를 통한 구원의 궤적은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이방인과 외국인으로 사는 모델을 제공한다. 베드로 사도가 그의 이전 삶의 부담과 후기 삶의 이주들의 무게와 씨름한 반면, 바울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의 삶과 그의 사역은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특징지어졌다. 모든 실향민들처럼,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오는 세상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외국인으로 살도록 부름받았다. 이주의 개념은 모든 선교 활동의 중심에 있으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이해하는 데 중심적이다. 여기 FDP들을 위한 선교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여섯 가지 간단한 신학적 틀들이 있다:

움직이시는 하나님

하나님 안에서의 움직임과 하나님의 움직임이라는 개념은 삼위일체적이고 선교적인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근본적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우리 삶과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는 성경의 하나님을 살아있고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만들며, 신도들에 의해 이곳저곳으로 운반되어야 하는 생명 없고 움직이지 않는 우상들과는 다르다(렘 10:5). 움직이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개념은 신적 존재를 사랑과 관계가 가능하게 하여 창조와 창조주 사이의 교제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낮아지고, 쏟아지고, 긍휼이 충만하고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고난받는 분으로서 인성의 육신을 취함으로써 움직이신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주로 그의 백성들을 온 세상으로 흩으시고 이주시키심으로써 그들을 움직여 왕국 통치를 확립하신다.

움직이시는 하나님은 세상의 FDP들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사역의 시작점이다. 이미 언급된 차원들 외에도, 움직이시는 하나님은 잃어버리고 흩어진 양들을 찾아 데려와서 상처 입은 자들을 싸매주시는 선한 목자로 제시될 때 분명히 나타난다(겔 34:11-12; 눅 15:4). 또한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 주의 깊게 찾는 여인(눅 15:8)과 방탕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달려가서 환영하고 회복시키는 아버지(눅 15:20)가 있다. 마찬가지로, 도둑들 가운데 넘어진 다친 사람을 돌보며 그의 상처를 싸매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서 그의 추가 치료비를 지불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다(눅 10:33-35). 마지막으로, 속박된 종이나 실향된 노예의 형태를 취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이 있다. 성육신은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땅으로 이동하시고 구원을 가능하게 하신 신적 이주로 인식될 수 있다(빌 2:5-8).

이러한 이미지들 중 일부는 슬픔과 애도에서 기쁨과 감사로의 움직임이기도 한 축하를 암시한다. 그들은 모두 신적 회복을 위해 일어나는 움직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백성을 세우고 신적 통치를 확립함으로써 세상을 사랑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움직이신다. 앤드류 월즈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비자발적이고 처벌적인 방식으로든 자발적이고 소망에 이끌린 방식으로든 이주를 사용하셨지만, 두 움직임 모두 구속적이라고 언급한다. 이주는 하나님의 선교와 목적과 연결되는 구속적 움직임이다. 하나님은 나라들에게로 움직이시고 사람들을 신적 자신에게로 움직이도록 부르신다. 이주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궤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는 그들을 교차점과 방향 변화의 여행으로 움직인다. 하나님의 선교와 목적을 위한 공식 또한 움직임 중 하나이다: 회개하고 따르라. 회개는 방향 변화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먼저 움직이신 대로 움직인다: 사랑하고, 섬기고, 부르고 귀향을 축하하기 위해.

삼위일체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개념은 사회성과 공동체성을 가능하게 한다. 삼위일체는 신적 존재의 살아있고 관계적인 본성을 강조한다. 이주의 맥락에서 사역에 도움이 되는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a) 세 위격 안에 한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은 복잡한 부분들로 나뉘지 않으신다. b) 하나님은 항상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삼위일체의 주체이시다. 이들은 완전히 실현되고, 완전하고, 온전한 세 위격이다. c) 그들은 함께 항상 하나로 행동하시며 서로나 피조물과 경쟁하지 않으신다. d)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위해 계신다.

이러한 원리들은 이주에서 하나님에게 너무 복잡하거나 불가능한 상황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삼위일체는 이주에서 다른 당사자들이 또한 어떻게 함께 온전함, 생명, 그리고 공동체를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창세기 기록에서, 우리는 이러한 다른 부분들이 작동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보시고, 부르시고, 분리하시고, 만드시고, 두시고, 창조하시고, 축복하시고, 더 많이 하신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움직이고 계신다(창 1:2).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들도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분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요한의 글 전체에 나타난다(요 1:2-3). 이것들이 삼위일체의 표현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창조 기록은 세상과 인류를 서로 조화롭게 완전히 창조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확립한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적 원리들은 신앙의 삶을 사는 것과 이것을 선포하는 꾸준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삼위일체로 표현되는 한 분 하나님의 일치는 완벽한 조화 안에서 서로 안팎으로 움직이는 다른 부분들에서 온다. 연합이나 삼신론은 없다. 오히려, 한 분이 다른 분과 관계하는 세 분 안에 완벽한 교제가 있다. 창조에서 삼위일체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한 위격이 활동하실 때 다른 두 분이 완전히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어떤 한 위격도 개별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신다. 예수는 그가 자신의 주도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른다고 말씀하시고(요 10:18) 그와 아버지가 하나라고 하신다(요 10:30). 아버지의 명령과 사역은 아들을 통해 확장되고 성령에 의해 완성된다.

이미 창세기의 창조의 복잡한 다양성에서, 삼위일체는 모든 것을 함께 붙들고, 반대되는 것들과 다른 당사자들을 함께 연결하시며 역사하신다. 삼위일체의 거룩한 공동체는 인간 가족을 위한 패러다임이 된다. 그러나 타락의 여파와 강제 이주의 맥락에서 시편 22에서처럼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으며 어찌하여 응답하지 아니하십니까?”라고 질문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실향민에게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그들은 어디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는가?

강제 이주의 도전들은 삼위일체의 도전들에 비하면 작다. 삼위일체의 차이들은 강제 이주의 차이들보다 무한히 크다. 삼위일체는 경계들을 탐색하고 다른 사람들의 측량할 수 없는 차이들을 극복하는 로드맵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외부에서 이 세상을 초월하고 들어오시지만, 하나님은 세상과 강제로 실향된 모든 사람들의 모든 곳에 내재하시므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너무 낮거나, 너무 높거나, 너무 어두운 곳은 없다. 어둠과 빛이 하나님께는 똑같다(시편 139). 삼위일체는 이러한 반대들을 함께 붙들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 이래로 인류와 함께해 왔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치, 존재 가치, 그리고 존엄성을 확립하기 위해 각 사람에게 형상을 새기셨다. 실향민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창조주와의 유일한 남은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본질적 부분으로서 그들에게 정체성과 소속감을 준다. 맨 처음에,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시기 전에(창 1:26), 세상은 형태가 없었다(창 1:2). 이 공허함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모든 구조들을 제자리에 두기 시작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서 인류를 더하신다. 그러면 형상은 남자와 여자가 세상에서 의미를 찾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본질적 구조를 주면서 창조를 완성한다. 예수가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막 12:29-31),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본질적 구조적 이해가 있는 것처럼, 대표적이고 관계적인 이해도 있다. 이 이해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창조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일치는 하나님의 일치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발견되며,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우리가” 만들자고 말씀하신다. 칼 바르트는 말한다: “그 형상은 사람이 있거나 하는 어떤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면 그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대표자로 기능한다. 형상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활동과 기능을 통해 그 표현을 찾는다.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일체처럼 실향민들의 세상에서 선교적 상호작용을 위한 초석이다

FDP들 가운데서의 효과적인 사역

하나님은 교회를 생명을 주는 선교와 사역으로 부르신다. FDP들의 맥락에서 이런 종류의 사역은 회복력을 구축하고 소망을 가져온다. 회복력은 불가능한 역경에서 다시 일어나 회복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취약성이나 의존성을 극복하고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으로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성품의 강함이다. 소망은 사람에게 미래에 대한 불굴의 확신을 준다. 그것은 신앙의 결과이며, 이것이 많은 FDP들이 기도와 신앙을 끈질기게 붙잡는 이유이다.

2012년 12월, 유엔난민기구(UNHCR)는 신앙 공동체들이 FDP들을 위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언급한 신앙과 보호에 관한 대화를 개최했다. 신앙 지도자들의 도덕적 지위는 난민과 수용 공동체 모두에서 긍정적인 태도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FDP들의 삶에서 정보에 입각한 결정과 지속적인 차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고등판무관은 결론지었다: “뿌리 뽑힌 사람들의 대다수에게, 두려움, 상실, 분리, 그리고 빈곤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큼 강력한 것은 그들의 신앙만한 것이 거의 없다. 신앙은 소망과 회복력의 중심이다.”

기독교인들에게 회복력과 소망의 현실은 그리스도에서 시작되어 FDP들에게 온전함과 복지를 기른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샘과 같고(욜 3:18) 번영하고 끝없는 생명을 약속한다(사 58:11). FDP를 위한 회복력은 생명의 우물과 같고 그리스도의 소망이 이 우물을 채운다. 강제로 실향된 사람들 가운데서 이러한 사역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표현으로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강화한다. 교회들은 이런 종류의 사역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수에 목마른(계 21:6) 사람들과 신앙의 최전선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가진 FDP들과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다음은 FDP들 가운데서의 사역을 위한 중요한 실용적 고려사항들이다.

신뢰와 존중의 관계

FDP들은 피난처와 음식 제공과 같은 중요한 거래를 포함하는 실용적인 필요와 도전의 일일 흐름에 직면한다. 충족되지 않을 때, 그들은 주요 위기로 폭발하고 심지어 죽음을 초래한다. 이러한 필요에 압도되기 쉽다. FDP들은 또한 정체성, 안전, 그리고 소속에 대한 필요와 함께 영혼의 상응하는 위기에 직면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안전할까? 그리고 어떻게 적응할까?

이주는 이러한 필요와 질문들을 영혼 깊은 곳에서 제기하며 그것들은 신뢰와 존중의 관계를 통해 가장 잘 다루어진다. 따라서 효과적인 사역은 거래적일 뿐만 아니라 관계적이다. 강제로 실향된 사람에게 신뢰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신뢰는 이 상호작용의 표시이다. 대부분의 경우 FDP들 사이의 신뢰는 침식되었고 불신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필요와 걱정을 고려할 때 존중받는다고 느낀다. 효과적인 사역은 그의 추종자들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와의 상호작용을 선택하도록 허용한 예수의 본보기를 모델로 한다. 이는 거래 이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신뢰의 문을 연다. 신뢰는 화해의 문제들을 매일 해결하는 상호적 걸음을 통해 오며 삼위일체에서와 같은 관계들에서 예시된다.

관계적 사역은 예수의 성육신의 본보기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걸으시겠다는 그의 약속을 따른다. FDP들 가운데서 그러한 사역들은 방문하고, 듣고, 함께 삶을 나누는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으로 증명된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모델로 하는 FDP들과의 참여는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변화와 신앙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거래 이상이다; 그것은 개인 대 개인, 마음 대 마음, 그리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나눈다; 그리고 종종 말 없이. 신뢰와 존중의 관계적 사역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에 뿌리를 둔다. 이것들은 모든 인간이 필요로 하는 정체성, 안전, 그리고 소속을 위한 구성 요소들이다. 신뢰와 존중의 관계들은 FDP들 가운데서 변화, 회심, 그리고 열매있는 사역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외상 인식 사역

외상 인식 사역은 FDP들의 신체적, 사회적, 감정적, 그리고 영적 복지에 대한 외상의 지속적인 영향을 인식한다. 외상은 반복되는 기억의 물결, 악몽, 그리고 삶과 일에서의 일상적 방해를 야기하는 심각한 부상이나 힘이다. 세상에서 FDP들의 절반 이상 – 대다수가 아니라면 -이 외상을 경험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쉽다. 그것은 그들의 악몽, 불면증, 기억 상실, 집중의 어려움, 피로, 불안, 우울증, 그리고 PTSD에서 분명하다. 구금과 같은 망명 시스템은 이러한 영향들을 악화시킬 뿐이다. 더 나아가, 망명 관리들, 경찰, 민병대, 그리고 갱단들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은 더 많은 영향들을 유발할 수 있다. 외상은 사람들을 추가 부상의 위험에 놓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외상을 야기한다. FDP들 가운데서의 사역은 외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복음의 빛과 생명을 그 문제에 비추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외상을 다루기 위해 지역 전문가들과 지역 공동체들을 모두 활용해야 한다.

치유 그룹은 실행 중인 외상 인식의 예시이다. 그것은 외상으로부터의 회복에서 다른 사람들의 동행이다. 계획된 일련의 모임에서, 이 그룹들은 다음과 같은 어렵고 중요한 질문들을 다룬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식으로 고난받는가? 내 마음의 상처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어떻게 잘 슬퍼할 수 있는가? 무엇이 내 고통을 없앨 수 있는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사역들은 FDP들이 그들의 질문에서 혼자가 아니며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야 한다.

이러한 치유 그룹들은 전문적인 도움을 대체하지 않고, 대신 서로의 짐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서로를 듣고 위로하는 허가를 주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힘을 활용한다. 그 그룹은 외상 치유를 프로그램이 아닌 여정으로 접근한다. 치유 그룹의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이 고통과 외상을 처리했고 훈련을 받았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상처 입힌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치유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치유 여정을 나눔으로써 사람들을 치유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치유 그룹은 신뢰의 유대를 만든다. 사람들은 판단받는 두려움 없이 그들의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다시 안전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조금씩, 공동체가 성장하고, 사람들은 다시 건강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상함은 삶의 일부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상할 때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계신다(시 34:18, 롬 8:19-22). 이와 같은 공동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하나님의 눈에 특별하다고 느끼는 곳으로 인도할 수 있다(롬 8:35, 38-39).

외상의 만연은 많은 FDP들이 그것을 무시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평가하기 어렵다. 생존이 우선순위이다. 그러나 외상의 상처를 무시하는 것은 강제 이주의 도전들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악화될 뿐이다. 한 여성이 나누었다:

“치유 그룹에 참여하기 전에, 나는 길을 잃었었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조차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캠프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나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요리를 하면서, 나는 불에 물을 올려놓고 그것을 잊었습니다. 나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부엌에 갔고, 갑자기 나는 그 아이가 비명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 아이가 끓는 물에 화상을 입었고, 이제 나는 죄책감과 씨름합니다. 외상 치유는 내가 다시 어머니가 되도록 도왔습니다.”

외상은 관계들을 어렵게 만든다. 많은 외상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인식하고 대한다. 그들은 사랑과 돌봄을 받을 수도 없고,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것을 줄 수도 없다. 외상받은 FDP들은 캠프에서든 도시에서든 갈등하는 관계들을 경험한다. 아이들은 아이가 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어른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들은 고군분투하고, 새로운 문화에서 사는 것은 그들이 가진 필요들에 더욱 영향을 미친다.

많은 FDP들의 명예-수치 문화들은 외상 치유를 복잡하게 한다. 많은 남성들은 종종 그들이 가치와 명예를 찾았던 과거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되돌아본다. 외상받은 사람은 그들의 이전 지위를 낮춘 경험들을 쉽게 무시한다. 평판 있는 국제 보건 기구에서 일했던 의사가 이제 난민 캠프에서 무직이다. 그는 그의 이전 직업의 오래된 사진들을 질투하듯 붙잡고 있다. 이것들은 그의 이야기와 사회적 지위, 부, 재산, 그리고 가족의 상실을 말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의 역할과 지위가 뒤바뀌고 상실되었다. 남성들은 가계 책임을 수행하지 못하고 종종 아내와 자녀들에게 맡겨진다. 남성들이 경험하는 상실들은 종종 폭력이나 이혼으로 이어지는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들은 아이들에게 더 많은 외상으로 이어진다. 일부 남성들은 가족들을 돌볼 수 없다는 수치가 견디기에 너무 클 때 캠프에 들어올 때 아내들을 떠난다. 일자리를 기다리는 중에 우울증이 시작되고 일부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로 이어져 가족들을 더 큰 어려움에 빠뜨린다. 생존 투쟁은 그들을 도덕적, 윤리적 옳고 그름의 감각이 상실되고 변화하는 상황들과 세계관으로 인해 잘못 알려진 절망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외국 땅에서 압박 하에서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거짓말을 했다(창 12:15-16). 오늘날 많은 FDP들처럼, 그는 취약하고, 무력하고, 결국 그 땅에서 추방되었다. 생존이 아브라함에게 최우선순위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축복하셨다. FDP들은 그들 자신을 비슷한 상황에서 발견하며, 종종 불법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교육에 대한 권리도, 취업 기회에 대한 접근도, 심지어 그들의 죽은 자를 매장할 권리도 없다. 이는 여러 층의 외상을 유발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집에서 폭력적이고 학대적으로 변하거나, 기독교 여성들이 가족을 먹이기 위해 성적 착취에 굴복하거나, 다른 실행 가능한 선택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급진화되는 젊은 남성들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것들은 사역들이 인식하고 기꺼이 그리고 능숙하게 다룰 필요가 있는 외상의 결과들이다. 외상 인식 사역들은 그리스도의 소망을 제공하고 감정적 안정, 회복, 그리고 치유를 그들의 삶에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이 된다.

한 난민 캠프에서, 외상 치유 사역의 참가자들은 그들의 치유를 경험한 후 그들의 인간성을 재발견하고 치유 공동체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침묵과 수치의 사슬을 깨고 싶어했다. 그들은 외상의 비참함에서 길을 잃기를 거부하고 대신 그들의 더 깊은 자존감과 자기 가치를 발견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들이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현재 상황들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다. 함께 작은 걸음들을 내디디면서 그들은 그룹으로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고, 함께라면 그들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그룹은 조직을 형성했고 노인과 장애인을 포함하여 600명 이상의 난민들에게 치유 그룹들을 통해 지원을 제공했다. 그들의 일은 역경 가운데서 회복력의 예시이다.

공동체와 상호성에 대한 전인적 초점

전인적 초점은 정체성, 안전, 그리고 소속에서부터 목적과 능력에 이르기까지 FDP들 사이의 측면들과 필요들을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전인적 사역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위에서 논의된 샬롬, 환대,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기초들을 끌어온다. 전인적 초점은 삶의 충만함에서 재건하고 회복하는 데 필요한 안정성을 위한 광범위한 기초를 만든다. 전인적 초점은 많은 FDP들이 경험하는 고립을 깰 수 있는 공동체를 가치 있게 여긴다. 공동체의 중심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환영받고 환영할 필요가 있다. 위의 공동체 기반 치유 그룹의 예시처럼, 환영하는 공동체들은 회복력에 필요하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사람들을 함께 결속시키고 사람들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공동체감은 특히 외상의 여파에서 강제 이주의 외로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추가적으로, FDP들은 집단적 외상을 다룬다. 집단적 외상은 한 집단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장기간의 외상 유형이며 공동체에서 집단적 치유를 요구한다. 공동체는 치유 여정에서 중요한 단계인 침묵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 침묵 속에서, FDP들은 고통을 부채질하고 질투, 분개, 분노, 그리고 복수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어둠의 목소리들을 듣는다. FDP들에게 그들의 공동체를 여는 교회들은 서로 사랑하고 이방인들에게 환대를 실천하고 있다. FDP들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교회들은 그들을 초대하고, 듣고, 그들의 맥락을 이해해야 하며, 우리가 우리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처럼 해야 한다. 이것은 주일 예배만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집중적인 시간과 공간을 요구한다.

이러한 공동체 모임들은 회복력의 우물을 깊게 한다. 그것은 FDP들을 통찰력으로 가득하고 위협, 문제, 또는 사례 연구가 아닌 ‘지역 동료들’처럼 대한다. 그러한 공동체들에서, FDP들은 효과적인 해결책을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경험의 전문가들이다.

난민 캠프의 지역 교회 공동체들과 함께하는 외상 치유 노력들은 이러한 사건들이 감정적 위기를 고치러 오는 외부 전문가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적이었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보기 위해 파트너로서 일하는 지역 교회 공동체들과 난민들의 팀들을 통해 성공한다. 그 결과들은 압도적으로 긍정적이고 기대를 넘어선다. 이론적이고 선교적 수준에서, 이러한 사역들과 공동체들은 종교간 대화와 문화간 학습의 예시들이다. 그들은 상호 개방성과 그들의 여정과 소망을 나누면서 서로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

사역에서 전인적 초점은 또한 사람의 삶의 목적을 확인하는 방법들을 찾는다. FDP들은 필요한 사람들 이상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이 지금까지 해낸 만큼 넓은 범위의 자원과 능력들을 가져온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책임지고 가족을 돌보고, 존엄성을 회복하고, 다시 새로운 관계를 확립하는 방법들을 찾고 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구걸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언어든, 기술이든, 또는 그들이 번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자격이든 새로운 삶에 필요한 능력들을 개발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강제 이주에서, 모든 것이 새롭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방법들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린다. 대부분의 FDP들은 예를 들어 적은 급료나 아예 급료 없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이용당했다. 교회들은 난민 캠프, 도시, 그리고 재정착 국가들에서 그러한 착취로부터 FDP들을 보호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관련된 노동법과 다른 절차들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새로 온 사람들은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지를 알 필요가 있으며, 그들이 법의 올바른 편에 머물도록 도와야 한다. 한 새로운 난민이 한번 인정했다: “나는 도움이 되지 않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한 공동체에 계속 연결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나와 같이 생기고 말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나는 사회에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역 공동체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인적 초점은 사역의 양방향 효과를 인식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수용 공동체들은 이방인으로 오는 사람들만큼이나 그들의 편견을 버리고 치유를 받을 필요가 있다. 전인적 초점은 가장 강한 사역이 양쪽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상호적인 것임을 인식한다. 이렇게 실향민들 자신도 사역에 똑같이 참여한다. 한 지역 청년 그룹은 한때 난민 미성년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며 섬기는 주간 사역을 개발했다. 몇 달 후 지도자는 되돌아보았다: “우리는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역을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우리에게 가장 많이 주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역은 거래적 이상이며, 다른 사람들이 사역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기여하는 것을 인정하는 상호적 관계들에서 자란다.

불행히도, 사역에서 상호성은 종종 인간으로서 회복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FDP의 참여를 무시하는 지원과 프로그램들에 의해 의도치 않게 차단된다. 이는 FDP들에게 비인간적이며 그들로 하여금 품위를 잃고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한다. 대안적으로, 사역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교회 공동체들은 FDP들에게 기꺼이 들어줄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고통을 하나님께, 그들의 치유자로서 가져다줄 수 있도록 도울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공동체 그룹들은 하나님의 샬롬을 제공하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장소를 제공한다.

FDP들은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매우 자원이 풍부하다. 교회들은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들은 약간의 지원만 주어진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FDP들은 게으르고 공허하지 않다. 그들은 외상과 이주에 영향을 받았지만 치유될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흉터를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은 배우고 다시 배울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고난에서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도록 도움받을 수 있다. 이 논문의 저자 중 한 명은 그녀 자신이 난민이었고 증언했다: “나는 내 나라를 떠나기 전에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놓는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난민이 되었을 때, 나는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나를 구별시키지 않았습니다. 나는 친숙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나는 소망을 잃었습니다. 나는 내가 피해자 이상이라고 상기시켜 줄 목소리들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셨지만 그 당시 나는 어떻게인지 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한 번에 한 걸음씩 내딛도록 격려받았고 그러면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몇 년간의 재학습 후에, 나는 내 목적을 재발견했고 내가 피해자 이상이라는 것을. 나는 30년 전 내가 있었던 곳에 여전히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말할 수 있는 목소리입니다. 교회는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 번에 한 사람씩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협력과 옹호

교회들은 FDP들을 섬길 독특한 기회와 책임을 가진 이주 맥락의 지역 행위자들이다. 그들이 직면하는 필요들은 어떤 단일 사역이나 조직이 충족할 수 있는 것보다 많으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FDP들은 특히 물질적 지원 이상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사역들은 진정한 연결과 돌봄의 지도를 제공할 목회자 지도자들과 관계들을 우선시해야 한다. 신뢰와 투명성을 실천함으로써, 지역 사역들은 지원과 이해의 환경을 조성한다. 이는 FDP들의 지역 공동체들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가치 있게 여기는 협력적 접근법을 보여준다.

과부, 고아,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정의를 개설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이 있다(신 10:18, 16:11; 출 20:10, 23:12; 시 146:9; 렘 7:6). 그들처럼, FDP들은 오늘날 권리, 지위, 자원, 장소, 또는 심지어 말조차 없는 목소리 없는 자들이다. 많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직면하는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하고 옹호할 필요를 이해한다. 이는 FDP들이 존엄성과 목적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재건할 수 있도록 힘을 준다. 궁극적으로, 이렇게 전인적인 방식으로 난민들을 섬기는 것은 사랑, 긍휼, 그리고 환대의 원칙들을 구현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는 자비롭고 포용적인 정신을 반영한다.

2014년 이라크에서 ISIS가 부상한 후, 일부 지역의 교회들 – 정교회, 가톨릭, 그리고 복음주의 -은 피한 이라크 난민들에게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함께 일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전통적 배경의 명목상 기독교인들이었다. 교회들은 구호 물품을 가지고 이 난민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논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지만 사랑하는 돌봄과 나눔을 통해 일부는 그리스도의 참된 추종자가 되었다. 한 가족이 호주에서 망명을 승인받고 떠날 준비를 할 때, 아버지가 인정했다: “나는 이 여정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고, ISIS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설명했다: “2년 전 ISIS가 침공했을 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었습니다. 나는 가족과 함께 피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예수를 찾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이 왔지만 이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옹호는 교회들이 응답하고 예수께서 그 사람을 보시는 대로 보도록 돕는다. 잠언 31:8이 말하듯이,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우리가 이것을 할 때, 우리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25:34-40에서 설명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은 그들에게 FDP 이웃들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므로, 옹호는 가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종종 관련된 정책들, 의견들, 언론 묘사들과 결정들은 편견과 반쪽 진실에 기초한다. 옹호는 FDP들을 피해자와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서의 거짓 정보의 마비시키는 효과를 바로잡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러한 일반적인 신화와 오해 중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a) 세계는 통제 불능인 난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FDP의 수는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두 배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문제들을 피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것은 우리가 문제를 더욱 다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난민의 수는 세계 인구에서 상대적으로 꾸준한 비율로 계속된다.

b) FDP들은 지역 공동체에서 일자리를 빼앗고 가격을 상승시키는 경제적 위협이다. 전 세계 GDP의 약 10%가 이민자들로부터 나오는 반면, 이민자들과 FDP들은 세계 인구의 4% 미만을 차지한다. 많은 새로 온 사람들이 그들의 수용 공동체들에게 서비스와 일자리를 제공하는 새로운 사업들을 시작한다. 현실은 이민자들이 그들이 혜택으로부터 받는 것보다 세금으로 더 많이 낸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자극한다.

옹호자들은 지역 교회들, FDP 지도자들, 그리고 다른 사역 파트너들 사이의 공평한 협력을 실천한다. 협력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겸손하고 경청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그것은 강제 이주의 맥락에서 어떤 일이든 결합된 노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우선시하고 무엇보다도 실향민들 자신의 참여를 우선시한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에 구현된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다른 덕목들의 왕국 가치들을 연결한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정부들과 다른 영향력 있는 의사결정자들과 같은 중요한 행위자들에 대한 신뢰성과 접근을 잃을 수 있다.

성공적인 옹고의 핵심 지표들은 다음과 같다: a) FDP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고려하기, b) 난민 현실에 대한 인식 증대하기, c) 이민자들과 FDP들과 관련된 잘못 배치된 두려움과 가정들 다루기, d) 교회들은 난민 사역들의 가치를 인식해야 함, e) 소외된 FDP 집단들을 주목하고 돌보기, f) 옹고가 응답할 실용적이고 적절한 방법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깨닫기.

윤리적 경계와 함의

FDP들과의 상호작용과 보호를 안내하는 국제법과 도구들의 본체가 있다. 이러한 법들과 도구들은 시민과 비시민을 구별한다. 이러한 국제 기준들은 인도성, 보편성, 평등, 독립성, 그리고 비차별의 가치들과 원칙들을 반영한다. 그들은 앞서 설명된 조약들, 국가적, 그리고 국제적 법들에 명시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할 책임을 지게 한다. FDP와 관련된 이러한 법들의 샘플은 다음을 포함한다: 사상, 양심, 그리고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 차별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망명권.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이해되고 종종 시민권법에 포괄되는 인권들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법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예시된 성경적 가치들에서 기원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늘의 시민들이다(빌 3:20). 신적 법에 대한 이 더 높은 충성은 교회로 하여금 국가적, 인종적, 또는 다른 어떤 영토적 한계들을 넘어서도록 도전한다. 불행히도, 불의와 위선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FDP들은 학대, 착취, 그리고 무례에 취약하다. 그 무시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현실들에 눈먼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한다.

윤리적 사역들은 자원 거래를 포함하는 관계들과 활동들에서 불균형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보여준다. 한 당사자가 복잡한 다문화적 맥락에서 자원을 통제할 때 작동하는 권력과 불평등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음식 배급이 전도와 결합될 때, 그것은 취약한 FDP들이 압박받거나 조작당한다고 느낄 수 있는 권력 역학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사역 프로젝트들을 위해 대량의 자금을 받을 때, 그 자금을 투명하고 공평하게 관리하기 어렵다. 우선순위들을 잘못 해석하고 섬김받는 사람들의 필요를 착취하거나 무시하는 일들을 하기 쉽다. 윤리적 사역들은 섬김받는 사람들의 존엄성, 자율성, 그리고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공정하고, 공평하고, 투명하고, 안전한 거래와 상호작용을 보장하는 경계를 가져야 한다. 이는 지침들과 섬김받는 사람들의 존엄성, 자율성, 그리고 명예를 보존하기 위한 과정에서 FDP 참여를 포함한다.

다른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들도 지역 사역들과 그들의 실천에 직면한다. 이러한 도전들은 이민 정책들, 국경 통제, 국가 주권 유지, 그리고 시민권으로의 길과 망명권 균형을 맞추면서 동시에 지역 시민들의 문화와 필요를 존중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복잡성들을 다루기 위해, 효과적인 사역은 국제법과 국가 주권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각 사람의 본질적 존엄성을 지지하는 명확한 정책들을 옹호한다. 좋은 정책들은 지원과 도움이 긍휼과 정의의 틀 안에서 제공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개별적 양심과 도덕적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사역들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아닌 집단들 사이의 대화와 아이디어 교환을 촉진하는 윤리와 함께 나라의 것들과 함께 세상의 복지와 관심을 이해한다.

결론

강제 이주민들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증가하는 현실이 되었다. FDP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신다. 실향민들이 직면한 복잡한 도전들을 다루는 것은 법적, 윤리적 지침들, 적극적인 옹호뿐만 아니라 문화적, 권력 역학에 대한 민감성을 포괄하는 포괄적인 접근법을 요구한다. 자발적 송환은 그들의 고향으로의 복귀에 대한 소망을 제공하지만, 지속적인 분쟁이나 안전하지 못한 조건들로 인해 항상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재정착 프로그램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와 함께 생명줄을 제공한다. 그러나 성공적인 통합은 FDP들이 그들의 삶을 재건하고 수용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중요하다. 이는 FDP들이 사회적 수용을 찾고, 교육에 접근하고, 고용을 얻고, 소속감을 확립할 수 있도록 지원, 자원, 그리고 기회들을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지역 행위자들 사이의 협력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모든 시나리오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많은 종류의 이주들이 성경과 신학 문헌 전체에서 발견되며, 기독교 역사는 세상의 FDP들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선교를 발전시킬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FDP들의 다양한 필요와 도전들을 다루는 전인적 접근법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 주님의 대위임령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대명령을 성취할 수 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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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Antonio Guterres, ‘Opening Remarks—Dialogue on Protection,’ http://www.unhcr.org/50c84f5f9.html
  21. For some helpful resources, see https://traumahealinginstitute.org
  22. For example, see IAFR.org toolbox and training for such ministries. 
  23. Hein de Haas, How Migration Really Works: The Facts about the Most Divisible Issue in Politics (New York, Basic Books, 2023), 3–6.
  24. Daniel Groody, ‘Crossing the Divide: Foundations of a Theology of Migration and Refugees’, Theological Studies, 70 (3) (2009): 66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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