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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 협업으로 장벽 극복하기

03 7월 2024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 또 [예수께서]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7)

2024년 제4차 로잔대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어떻게 하면 더 잘 협력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이를 위해 분열, 차이, 힘의 불균형 등 유익한 협업을 가로막는 세 가지 장애물을 아래에서 다루고자 한다. 에베소서 2장 11-22절은 곧 출간될 책에 기반하여 이 대화의 문을 열게 된다.[1]

일부 학자들은 에베소서 2장 17절이 이사야 52장 17절, 57장 19절을 모두 인용한 복음서 본문이라고 지적한다.[2] 에베소서 2장 17절에는 ‘그[예수]는 멀리 있는 너희에게 평화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셨다’고 되어 있다. 겹치는 부분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분으로서, ‘먼 곳과 가까운 곳에'(사 57:19) 평화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사 52:7).[3]

성경의 큰 이야기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모인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며, 그리스도는 평화를 이루시고, 그리스도는 평화를 전파하신다.(엡 2:14, 15, 17)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분열의 극복

에베소서 2장 13-16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대해 강조하는 부분을 주목하라. ‘멀리 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이 왔다.’(13절), 예수님은 ‘육신으로 막힌 담을 허시고'(14절) 적대감의 막힌 담을 허셨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십자가를 통해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적대감을 없애셨다.’(16절), 그리스도는 ‘둘을 대신하여 자기 안에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을 이루신다.’(15절).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이 되는 새로운 방식이 있다. 예수님은 깨어진 인류를 화해시켜 샬롬을 창조하신다. 한때 분열되었던 민족이 이제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가 되었다.(2:19-22)

분열의 극복

본문은 종종 간과되는 진리, 즉 그리스도께서 사회적으로(socially) 무엇인가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스도는 분열되고 분리되어 적대적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하나로 만드셨다. 십자가는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뿐만 아니라 서로를 화해시킨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속죄하시고, 구원하시고, 분열된 사람과 민족을 화해시키신다.

본문은 종종 간과되는 진리,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스도는 분열되고 분리되어 적대적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하나로 만드셨다.

이것이 세계 교회의 상처를 주는 분열에 얼마나 자주 적용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미 ‘적대감을 죽임으로써’ 분열을 해결한 것은 아닐까?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화해, 수평적으로는 서로 간의 화해가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십자가 사역의 일부라면 어떨까? 그리스도는 우리를 끊임없이 화해로 이끌고 계신다.

 [올리비아]: 토고를 방문했을 때 예기치 않게 파트너들로부터 긴장된 반응을 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지키지 않은 약속을 했다고 말했다. 우리의 분열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공감의 경청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고, 방어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어렵게 전임자들의 행동에 대한 비난을 흡수했다. 용서를 구하면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수님과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는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했다. 상처받은 파트너십은 속도를 늦추고,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경청하면서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통해 차이극복하기

에베소서 2장 11절에서 바울은 ‘할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육체의 이방인인 너희’에게 편지를 쓴다. 이는 다윗이 골리앗에게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냐’고 조롱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삼상 17:26). 유대인에게 ‘할례’라는 단어는 엄청난 오명을 가지고 있다. 이방인은 더럽고 우상을 숭배하는 외부인이며 하나님 백성의 적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너희가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이스라엘 동족으로부터 소외되고 약속의 언약에서 나그네가 되어 소망이 없고 세상에 하나님도 없음을 기억하라'(엡 2:12, ESV 역자 번역, 개역개정에는 기억하라가 생략됨)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인의 다름을 확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과 비교하면 이방인은 ‘아무 지위도 없는 백성’이다. 그러나 몇 구절 후에 바울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바꾸는 아름다운 반전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여러분은 더 이상 나그네나 외국인이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안의 지체가 된 동료 시민입니다'(18-19, ESV 역자 번역). 우리는 모두 하나님 백성의 일부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이시다!

차이 극복하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광은 차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를 아는 영광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경쟁과 명예 경쟁의 게임을 멈출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명예의 풍요로움을 얻는다. 사실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영광에 비하면 다른 모든 명예의 원천은 ‘쓰레기와 같다'(빌 3:5-8, ESV 역자 번역)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영광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경쟁과 명예 경쟁의 게임을 멈출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명예의 풍요로움을 얻는다.

요한복음 17장 22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영광을 공유하기 때문에 명예에 대한 갈망이 충족된다. 우리는 더 이상 명예를 얻기 위해 경쟁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명예를 나누기 위해 경쟁한다.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라고 가르친다.

[올리비아]: 나는 동료 성도들을 만날 때 종종 “당신의 예수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라고 묻곤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연결된다. 그러면 지위, 부족, 국적의 차이가 바로 무너진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역 파트너로서 함께 성취하는 모든 것의 기초다. 최근 동아프리카를 여행할 때 나는 케냐 선교사의 소박한 시골집에 앉아 있었다. 함께 예배의 노래를 부르며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우리가 함께하는 기쁨의 연합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통해 권력 거리(power distance) 극복하기

예수는 마가복음 10장 42-44절에서 두 가지 종류의 권력을 설명한다. ”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속적인 권력은 ‘지배하는 힘’이다. 신성한 권력은 섬기는 힘이다; 그것은 ‘아래에서의 힘’ 또는 성령과 함께하는 힘이다.[4]

로마 제국은 신약의 배경이며 ‘지배하는 힘’의 전형이다. 로마는 힘과 피 흘림을 통해 세속적인 ‘평화’를 이룬다. 로마의 유명한 황제 선전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다.

바울은 로마의 권력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서 에베소서에 편지를 쓴다(엡 3:1, 4:1, 6:20).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을 묘사한다(엡 1:19-21).

로마의 ‘지배하는 힘’은 공포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창출하고, 피 흘림을 통한 평화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아래에서의 힘’은 자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완전히 다른 종류의 평화를 창출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용서하고 화해시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창출한다(엡 2:13-17). 예수의 ‘아래에서의 힘’은 폭력을 꾸짖고 전복한다.

에베소서 2장 17절에서 그리스도가 이사야 52장 7절과 57장 19절을 성취하는 것을 기억하자. 예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고난받는 종이다. 그는 ‘멀리 있는 자들과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샬롬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들도 ‘평화의 복음’을 구현하고 전한다(엡 6:15).

권력 거리 극복하기

권력 거리는 ‘양측 간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와 그 불평등에 대한 수용 수준’이다.[5]

권력 거리는 ‘지배하는 힘’을 필요로 한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개인들은 ‘지배하는 힘’에 쉽게 유혹된다. 그러나 예수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6] 마찬가지로, 집단도 ‘지배하는 힘’에 유혹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정치적으로 세계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나와 다른 미국인들은 세계 교회 파트너들과 ‘지배하는 힘’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예수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신다.

권력 거리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지배하는 힘’에 대한 그리스도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성령의 ‘함께하는 힘’으로 평화의 복음을 더 잘 구현할 수 있는가?

[올리비아]: 권력 거리는 세계 교회에 있어서 결코 작은 도전이 아니다. 다문화 파트너십 사역을 이끌면서 나는 이것이 매우 진실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다음과 같은 관점을 거부한다: 풍부한 재정 자원이 뛰어난 지식이나 영적 성숙을 의미하며, 내가 이끌고 다른 이들이 따라야 한다는 기대. 오히려, 나는 우리 사역 파트너들과의 긴장 지점이나 의견 차이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우리가 의견이 다를 때, 그것은 신뢰의 신호이다. 우리의 파트너십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생명에 닿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보기 위한 공유된 비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다문화 사역에서 권력 거리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겸손히 따르며 이 도전에 대해 더 신중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함께하는 힘’과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을 신뢰하여 우리의 불완전함을 통해 그의 목적을 이루도록 할 수 있다.

Endnotes

  1. To be published in 2025 by William Carey Publishing, One New Humanity: Glory, Violence, and the Gospel of Peace by Kristin Caynor and Werner Mischke.
  2. Willard M. Swartley, Covenant of Peace: The Missing Peace in New Testament Theology and Ethics (Grand Rapids: Eerdmans, 2006), 200–201.
  3. 에베소서 2장 17절 (ESV)에서 ‘평화를 전하셨다’는 표현은 “euēngelisato eirēnē”다. 여기서 “euēngelisato”는 복음의 동사형이다. “euēngelisato eirēnē”는 ‘평화를 복음으로 전했다’ 또는 ‘화합의 복음을 전했다’는 의미다.
  4. ‘power over versus power with’에 관한 대화에서 나는 큰 도움을 받았다. David E. Fitch, Reckoning with Power: Why the Church Fails When It’s on the Wrong Side of Power (Brazos, 2024), Kindle edition.
  5. https://en.wikipedia.org/wiki/Power_distance.
  6. 이 또한, 이 표현 방식에 대해 David E. Fitch에게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