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으로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 1:15).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는 예수님의 입술에 다른 어떤 말보다 자주 등장한다.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104번이나 등장한다. 비슷한 표현을 살펴보면, 예를 들어 ‘믿음’ 또는 ‘믿는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입술에서 70번, ‘사랑’이라는 단어는 36번, ‘성령’은 35번만 등장한다. 따라서 모든 복음 전도자는 예수님 설교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였다는 데 동의한다.
이 개념은 예수님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이 개념은 구약성경에 스며들어 있다. 예수님은 언젠가 하나님이 이 땅에 해방적인 통치를 확립하실 것이라는 고대인들의 기대를 전제로 하셨다. 예수의 유대적 유산과 그가 살았던 문화적 틀을 잊어버리면 그의 메시지를 잘못 해석할 수 있다.
예수 사역의 중심에는 몸을 괴롭히는 질병, 마음을 괴롭히는 악마, 사람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수치심, 인간 공동체를 파괴하는 우상숭배와 위선 등 악의 세력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완전히 연약한 상태에서 한 도전이었다. 그 도전은 겟세마네의 고통과 골고다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고통으로 이어졌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와 굴욕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타인의 손에 의해 잔인하게 고통받는 모든 이와 하나님의 사랑의 연대를 보여주셨다. 물론 그분은 희생자뿐만 아니라 사형 집행자, 방관자 등 모든 죄인과 연대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정치 체제의 희생자이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이와 사랑으로 연대했던 그도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희생자가 되었다. 피해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용서는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후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구조에 대한 공모에서기꺼이 돌아설 때(‘회개’) 비로소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와 정치 시스템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직접적으로 우리 자신의 고통이 아닐 수도 있는 고통을 포용하도록 부름받았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 현재의 세계 질서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의 편안한 관점을 거부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선언문
마태복음 5~8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언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 즉 새로운 세계 질서가 어떤 모습인지 설명한다. 그분의 나라에 속하고 그분의 오심이 참으로 ‘좋은 소식’인 사람들의 성품에 대한 여덟 가지 설명(5:3-12)으로 시작된다.
첫째로,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3절). 그들은 자신의 삶을 포함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으며, 부서져서 온전히 하나님께 의존한다. 둘째로, 그들은 ‘애통하는 자들’이다(4절). 자신의 죄와 자신이 사는 사람들의 고통과 죄에 대해 슬퍼한다. 셋째로, 그들은 ‘온유한 자들’이다(5절). 그들은 비굴한 겁쟁이가 아니며, 자신의 야망이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주목하지 않고, 명예와 특권의 자리를 포기한다. 넷째로, 그들은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6절). 제자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으며,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변호를 갈망한다. 다섯째로, 그들은 정의를 향한 갈망과 함께 자비를 베푸는 능력을 갖춘다(7절). 이는 단지 정의를 향한 갈망만으로는 사람들을 강경하고 자기 의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의의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자비를 베푼다. 여섯째로, 그들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다(8절). 이는 동기의 단일성과 마음의 분열되지 않은 충성을 의미한다. 일곱째로, 그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이다(9절). 그들은 가족, 도시, 국가 간의 갈등과 폭력의 상황에 스스로 나서서 다리 역할을 하고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회복한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정의를 위해서나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증언을 위해 박해를 받는다(10, 11절).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이 그들의 사회에 미칠 영향을 예언하며,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한다. 하나는 부정적인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비유이다. 부정적인 비유로는 소금(13절)이다. 소금이 고기나 생선에 문질러질 때 박테리아 부패를 방지하는 것처럼, 제자들이 그들의 사회에 문질러져서 그들의 독특함을 살아낼 때 그 사회의 도덕적, 영적 부패를 방지할 것이다. 긍정적인 비유로는 빛(14절)이다. 제자들은 그들이 속한 국가의 비즈니스, 정부 및 기타 기관의 어두운 영역을 드러내고 쫓아내는 빛과 같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그들이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의, 자비, 평화 만들기 등의 ‘선한 행위’를 통해 회의적인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16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와 미래의 현실임을 증거로 보여주며, 그 통치의 징표, 맛보기, 도구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거나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증인
예수의 길은,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야 할 길인데, 세상으로부터 종교적 성역으로 물러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 통치의 이름으로 현재의 세계 질서를 지배하는 권력에 대해 단호하면서도 취약한 도전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반문화적인 방식, 즉 예수님의 고난을 포함한 그 방식에 참여하는 만큼, 교회는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전달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 서구 복음주의 서클에서 넘쳐나는 선교 ‘진보’의 척도와 교회 성장의 비결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 선교는 세상이 생각하는 ‘성공’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성공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방식은 복음 전도나 사회 프로그램을 통해서가 아니며, 종교 전문가를 늘리거나 더 많은 선교 기관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 학교, 공장, 마을 회의, 연구소, 기업 이사회 등에서 그리스도인 남성과 여성의 성품과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이다. 이것들이 현대 기독교 선교의 장소들이다..
나는 한 아시아 국가에서 헌신적인 기독교 정치인 몇 명과의 만남을 기억한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야당 정당을 대표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오순절 교단 등 다양한 교회 전통에서 왔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의 일에서 가장 큰 좌절감의 원인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들이 “당원으로서 해야 하는 타협” 같은 것을 말할 줄 알았지만, 대신 그들은 한목소리로 “우리 교회”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교회로부터 정기적인 기도, 재정 지원, 사회 정책 실행을 돕는 자원봉사자 등 어떤 형태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한 여성 국회의원은 자신의 교회가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다문화 선교사와 젊은이들을 단기 ‘선교 여행’으로 보내기 위해 거액의 자금을 모금했지만, 그들의 정치인으로서의 일은 ‘선교’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인 유일한 때는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괴롭힘을 당하고 그들이 의회에서 그들을 대변하기를 원할 때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전 세계에서 반복되고 있다.
나는 주로 세속 직업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이 과학, 비즈니스, 예술, 의학, 교육 등 분야에서 복음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전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적으로’ 활동하는 이 남성과 여성들은 선교의 최전선에 있다. 그들은 새로운 의학 기술, 새로운 소셜 네트워크 미디어, 유전자 변형 작물, 선물 거래 및 헤지펀드, 반테러법, 기후 변화 및 생물 다양성 손실과 같은 거대한 윤리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깊은 선교적 참여와 선교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칠레의 학자 변호사인 로시오 파라(Rocio Parra)는 창조세계를 돌보라는 기독교적 확신에 영감을 받아, 바다와 해양을 전통적인 ‘영토’ 개념에 포함시켜, 자국의 새로운 헌법에 환경 보호를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은 20년 넘게 전쟁으로 분열되어 왔으며, 현지 군벌과 자국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착취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얽혀 있다. 이 전쟁에서 대량 강간은 하나의 무기였다. 기독교인 산부인과 의사인 데니스 무퀘게(Denis Mukwege)는 이러한 여성들을 위해 수술과 심리적 검사를 결합하고, 고용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도록 돕고, 그들이 법적으로 가해자를 법정에 세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계적 치료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는 2013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1]
우리 중 대부분은 우리가 행하는 하나님의 일로 이 생에서 그렇게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일이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도 최후의 심판의 날에야 비로서 밝혀질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반대, 낙심 또는 깊은 실패감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으로 부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