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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딸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집에서 아무런 종교적 배경이나 훈련 없이 자란 한 친구를 데려왔다.[1] 그 여자아이는 내게 말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싶기는 해요. 만약 그분이 정말로 세상에 변화를 만들 수 있다면요.’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말문이 막혔다. 첫째로, 나는 아이의 말속에 그 세대의 눈물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거주하는 20, 30대 중 절반이 조금 넘는 사람들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이 비율이 과거에 비해 떨어진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그들의 사회 속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고,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사랑으로 다가가기보다는, 판단을 일삼는 위선적인 곳이라는 인식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2]

내가 그 아이의 말에 충격을 받은 두 번째 이유는 나의 배경과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나 역시 집에서 종교적 배경이나 훈련이 없이 자랐다. 나의 조부모님은 멕시코와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왔다. 그분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교회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었다. 나는 구주이시며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1970년도 예수 운동(Jesus Movement)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운동을 통해 나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천국으로 부르시는 예수님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해가 거듭되며 나는 조금씩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과 풍족한 삶을 약속하시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한 사람 전체를, 가족 모두를, 공동체 전부를, 온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구세주가 있다. 온전한 복음은 만유의 주재이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선포와 증거를 담아낸다.

‘변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반구의 많은 사람에게 풍족한 삶에 대한 약속은 개개인의 삶으로 한정되고, 이는 결국 개인의 삶에서만 효과를 일으킨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적 세계관은 개개인을 공동체의 배경 안에서 바라본다. 예레미야 29장에서 포로들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이는 각 개인의 가정의 건강한 삶은 공동체가 얼마나 건강한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65장에서 우리에게 풍족한 삶을 경험하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비전을 보게 된다. 그곳의 사람들은 긴 삶을 누릴 수 있기에,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들은 집을 짓고 그곳에 살며, 포도원을 가꾸고 그 열매를 먹는다.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수확을 즐기는 것이다. 아무도 그들의 집, 농장을 빼앗을 수 없다. 그들의 자녀들은 불행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과 늘 함께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공동체 안에서 살기 원하지 않는가? 폭력과 위법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소망은 더 클 것이다. 기독교 기반 공동체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Ernesto Cardenal)에 의해 기록된 성경 연구 모음집인 솔렌티나메에서의 복음(The Gospel in Solentiname)에서, 마그니피캇(Magnificat)을 처음 읽는 젊은 남자가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노동의 열매를 봉건제의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기아와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자녀들을 둔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3]

하지만, 전 세계를 아울러, 심지어 그리스도인을 지도자로 두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이런 평화의 비전이 열매 맺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빈곤에 처한 사람들이 일찍, 안타깝게,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1986년에 나는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있었고, 1마일 정도 떨어진 두 병원에서 병원 채플린(chaplain)으로 섬겼다. 국제 어린이 병원(The National Children’s Hospial, NCH)은 도시 내에 가장 상황이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을 섬겼다. 영국 성공회 교도에 의해 운영되던 세인트루크(St. Luke’s) 병원은 주로 중상류층 가정에 탁월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어느 날, 내가 NCH에서 환자를 심방하고 있을 때, 한 의사가 내게로 와서는 한 어린아이가 죽어간다고 그 아이의 가정에 소식을 전해달라며 도움을 요청해왔다. 그 아이는 항생제를 사용하면 어렵지 않게 치료받을 수 있는 폐렴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해당 병원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항생제인 페니실린(penicillin)에 알레르기가 있었다. 1마일 떨어진 기독교 병원인 세인트루크에는 20여 가지 종류의 항생제가 돈 내고 이를 사용할 재정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한 재정의 여유가 없던 그 아이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 아이의 죽음은 일찍, 안타깝게, 부당하게 찾아왔다.

간격(gap)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살기 원하시는 함께 누리는 풍족한 삶에는 격차가 있다. 이런 격차를 두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이것이 청지기 정신에 대한 질문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무엇을 주셨는가? 그분은 그분의 시간, 능력, 에너지, 마음을 주셨다. 결국, 그분의 그분의 삶을 주셨다.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신 것이다. 그분을 따라가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이 해야 한다. 사랑으로의 부르심은 특정한 일련의 활동에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을 또한 사용해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현명하게, 효과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2절을 통해 말씀하신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 시대에는 항생제가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있다. 현대 의약과 이런 의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과학은 좋은 선물이다. 모든 좋은 선물은 베푸시는 한 분으로부터 온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널리 전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좋은 선물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볼 때, 사랑은 우리에게 반응하도록 강요한다. 가장 먼저 나오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사회 과학의 언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이것을 직접적인 봉사라 칭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어쩌면 더 현명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 이것은 종종 개인의 발전이라 불린다. 어떤 상황에서는, 공동체 발전의 한 형태로서 ‘함께 낚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물론, 강가로 낚싯대를 들고 내려갔는데 입구가 막혀있다면,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강가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굶주림을 멈출 수 있는 자원 앞에 놓인 장벽은 대개 공공의 결정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낮춰지기도 한다. 개인의 결정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공공의 결정은 우리 공동의 삶,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가난한 아이가 학교에 갈 수 있는가? 공공의 의사 결정권자들이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낮은 학비를 책정한다면, 그 가난한 아이는 교육받을 수 있다.

청지기 정신에 대한 질문은 과연 우리가 대중의 의사 결정 과정에 있어서 역할이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이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 목소리를 보탤 수 있는 정부의 시스템이다. 옹호는 대중의 의사 결정자에게 책임감을 실어주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들이 전체 지역 사회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과정이다. 공동체를 조직화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서 대중의 의사 결정자에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목소리와 영향력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의 독재 정권 하에 있는 필리핀에 살아보니, 나는 민주주의라는 선물에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종종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이 선물들을 사용하기보다는, 묻어버리곤 한다. 심지어 민주주의 체제가 없는 국가에서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지도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종종 있다. 이 모든 응답이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에서 적절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4]

결론: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긍휼의 이야기

여러 가지 다른 활동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고 이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 하나로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여러 단계의 이 이야기는 가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민자와 난민, 여성 및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 집단 투옥, 그리고 환경 파괴와 같은 지역사회가 겪는 다양한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에 관하여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다.

몇 년 전, 나는 노숙인들과 함께하는 사역을 리드하는 팀의 일부로 있었다. 우리는 저녁 시간에 그들이 찾아올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교회에서 제공하여, 성경 공부에 참석하고 간단한 간식을 즐길 수 있으며, 관심과 배려가 느껴지며, 마치 집처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날 저녁 행사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아이로 구성된 새로운 노숙 가정이 참여했다. 그들은 차에서 자고 있었고, 날씨가 매우 추웠다. 그들이 나에게 하룻밤을 머무르며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찾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찾을 수 있는 모든 비상 대피소에 연락을 취했으나, 모두 가득 차 있었다. 나와 같이 사는 친구들에게도 물었지만, 그들은 더 많은 노숙자를 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그들을 추위 속으로 보내야 했다. 마태복음 25장을 읽은 나는, 내가 누구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아니, 이렇게 되어서는 안 돼’라는 깊은 외침이 있었다. 다음 주에,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놓고 함께 고민할 교회를 찾기 위해 주변에 있는 교회에 연락을 돌렸다. 매일 밤 교회가 협력하여 교대로 긴급 대피소를 운영함으로써, 우리 도시의 긴급 대피소 침대 수를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간증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직접적인 봉사의 단계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지, (그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활용하여)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었고, 또한 일시적이었다.

몇 년 후, 우리는 더 현명한 접근법을 찾았다. 우리는 노숙자들 사이에 동료 채플린 핵심 그룹을 세웠다. 그들은 교회에서 참여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일하며 우리 공동체 안에서 노숙자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우리는 도시의 가난한 지역에서 집 두 채를 수리했고, 저렴한 주택으로 만들었다. 노숙자들이 직접 집수리에 참여하며 그 프로그램의 일원으로 함께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힘에 대한 더욱 아름다운 간증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집들을 개방하는 축제를 가질 때, 나는 이 집들에는 대략 20여명만이 수용 가능하며, 지역 공동체 안에서는 만 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날 밤에 노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5]

그 후, 우리는 노숙자를 위한 보다 영구적인 선택지를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세상의 연합 단체와 협력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도시와 민간 부문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 연합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나, 세상의 일부로 있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세상 속의 사회와 함께 나란히 일하며, 우리의 사역에 동기가 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믿는 자들은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다. 서로의 건강한 삶에 대한 철저한 관용과 깊은 헌신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주님께서 날마다 그들의 수를 늘려가셨다. 온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가 예수님을 세상에서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예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한다.

미주

  1. This article is based on the author’s presentation at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during its Annual Mission Week, September 2021.
  2. David Masci, ‘Q&A: Why Millennials Are Less Religious than Older Americans,’ Pew Research Center, January 8, 2016, https://www.pewresearch.org/fact-tank/2016/01/08/qa-why-millennials-are-less-religious-than-older-americans/. Gregory A. Smith, ‘About Three in Ten U.S. Adults Are Now Religiously Unaffiliated,’ Pew Research Center, December 14, 2021, https://www.pewresearch.org/religion/2021/12/14/about-three-in-ten-u-s-adults-are-now-religiously-unaffiliated/.
  3. Ernesto Cardenal, The Gospel in Solentiname (Maryknoll, NY: Orbis Books, 1976), 18.
  4. There is a wide variety of materials which highlight holistic Christian responses in these areas of concern, including the following publications: Stephen Offutt and F. David Bronkema et al., Advocating for Justice: An Evangelical Vision for Transforming Systems and Structures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6); Alexia Salvatierra and Peter Heltzel, Faith-rooted Organizing: Mobilizing the Church in Service to the Worl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3); Adam Taylor, Mobilizing Hope: Faith-Inspired Activism for a Post-Civil Rights Generatio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0); and Matthew Soerens and Jenny Yang, Welcoming the Stranger: Justice, Compassion and Truth in the Immigration Debat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8).
  5.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A Holistic Approach to Poverty Alleviation in Asia’ by Kumar Aryal, in Lausanne Global Analysis, July 2022,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7/a-holistic-approach-to-poverty-alleviation-in-asia.

알리샤 살바티아라는 센트로 라티노(Centro Latino)의 학장이자, 풀러(Fuller) 신학대학원의 선교와 세계 변화 과목의 부교수이다. 그녀는 기독교 공동체 개발, 신앙 중심의 공동체 조직화 및 지지, 필리핀에서의 선교사 생활, 지역과 국가 비영리 단체의 리더십, 그리고 스페인어와 영어의 회중 사역을 포함하여 실천가로서의 40년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Faith-Rooted Organizing: Mobilizing the Church in Service to the World 및 Buried Seeds: Learning from the Vibrant Resiliency of Marginalized Christian Communities의 공동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