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대단히 공격적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 3:23).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를 지었고 벌을 받아 마땅하다(롬 6:23). 복음은 아무리 많은 자기 신뢰, 선행, 혹은 전통이 있다해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바로잡을 수 없고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롬 3:20-22) . 복음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고 돌아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불쾌감을 주어 식사 중 대화 소재로는 환영받지 못한다.
위에 요약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즉, 한 문화나 개인의 다양한 가치 또는 세계관에 도전하거나 고치려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그들을 화나게 하거나 무관심하게 만든다. 우리가 전하는 메세지의 내용과 그 전달 방식으로 인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메시지의 핵심을 희석하여 복음을 더 마음에 들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에반 번스(Evan Burns)는 복음의 맥락화(contextualizing)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복음을 적절하게 맥락화하는데 주로 힘쓰는 선교사는 무심결에 복음을 전도 대상의 문화 가치 체계와 어울리게 변경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복음을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하는 선교사는 그 문화의 가치 체계와 언어를 이해하고자 힘쓰게 되어 근본적인 아담의 죄와 부패의 문제와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과 전가된 의를 통해 얻는 해결책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1]
사람들은 자신이 올바르지 않게 살고 있으며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내용이 전달되지 않으면 그들은 온전한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다(고전 15:3-5). 그렇다면 문제는 평화와 관용을 중시하는 문화속에서 공격적인 복음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 이해하기
먼저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의 정의를 내려보자.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는 공동체가 확립한 일련의 신념을 기반으로 존중, 관용 및 확언을 통해 개인 간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공동체이다.
그런 문화권의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에게 도전을 하거나 제3자에게 그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을 피할 것이다. 조화를 깨뜨리고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은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더 깊은 세계관을 정의하는 신념과 아이디어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러나 이런 문화권의 사람들은 평화 유지에 대한 기대나 공동의 신념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맞대응할 것이다.
타당한 구조 세우기
전도에 대한 대화는 보통 양극화 된다. 한편으로는, 믿을만한 전도의 도구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전하고 즉시 결정을 촉구하며 가능한 모든 기회에 복음 선포를 추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어떤 형태의 선포를 하기 전에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을 우선시하는 관계적 방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자의 방식은 대개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선포와 깊은 관계 맺기 모두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둘은 연속적인 요소가 아니라 동시에 발생하는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 언젠가 복음에 도달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참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선포가 항상 완전한 복음 제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체 이야기가 한 번에 다 전달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질문을 받거나 이야기를 나눌 적절한 기회가 있을 때, 특히 관계의 진정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권에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에 정직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을 찾는데 있어서 이런 나눔은 중요하다.
관계 초기에 세심한 나눔과 더 깊은 우정에 대한 투자는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의 사람들과의 간극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 ‘타당성(plausiblitiy) 구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모두 중요하다. 이런 구조는 자신의 신념이 신뢰할 수 있는 상황, 시스템 또는 틀을 의미한다. 이런 타당성 구조는 새로운 신념과 새로운 공동체의 조합으로서, 둘 다 변화를 이루는데 필수적이다.[2] 우리의 목표는 새로운 구조를 구축하기 위한 적절한 재료와 청사진을 제공하는 것이다. 재료는 다양한 신념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청사진에는 재료를 활용하기 위한 공동체의 틀과 삶의 방식이 포함될 수 있다.
서아프리카와 미국에서의 몇 가지 예
내가 살고 있는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그런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대개는 공동체의 압력 때문에 결국 신앙을 버리게 된다.
데이비드 마란즈(David Maranz)는 평화를 사랑하는 세네감비아 지역에 대한 인류학 연구에서 ‘인간의 정신에 깃드는 평화는 인류와 초경험적 세력 간의 조화를 이루는 상태의 결과’라고 썼다.[3] 이 특정 공동체는 그들 내부에서, 다른 사람들과, 또는 공격이 있는 경우 더 높은 세력과의 조화를 잃게 될 것이다. 공동체가 믿고 있는 신념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룹에서 완전히 제외될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지원 구조 전체를 잃게 된다. 이런 생각은 복음의 진리와 그 공동체가 서로 상충할 때 개종에 대한 확신을 전혀 갖을 수 없게 한다. 이 믿음안에 분명한 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이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이 정보가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마음에 타당한가?’를 물어야 한다.
위의 경험은 서양 사람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서부의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람들과 더 많이 둘러싸일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편안함, 관계 및 전반적인 삶의 목적을 약속하는 그럴듯한 삶의 구조를 만든다. 그들은 올바른 자료와 틀 없이는 새로운 신념으로 즉시 전환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대개 이러한 문화권에서는 불쾌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복음이 공동체 전체가 가치 있게 여기는 자아실현을 향한 여정에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과 자유를 원한다.
적절한 재료와 청사진 사용하기
그렇다면 이 새로운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우리는 재료들와 청사진을 어떻게 제공해야 하는가?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복음 이야기의 일부를 섬세하게 나누는 것은 이 작업의 중요한 단계다. 한 꺼번에 재료를 다 꺼내거나 친구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기초 작업을 하고 기초를 구축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계 초기에 분명한 선포를 하면 기반을 다질 수 있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어디쯤에 와 있는지 측정하고, 나아가 우리의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로 누구에게 우선순위를 둘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 제시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들로 인해 우리는 어떤 특정 사람을 위해 추가해야 하는 또 다른 틀을 생각하게 된다.
복음 선포와 함께 우리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준비된 공동체안에서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청사진이다. 이것은 사람들을 집으로 식사를 위해 초대해서 만들어진 개인적인 친분 그룹을 통해 가능하다.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는 환대를 가치 있게 여기며,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서로 다른 인식의 벽을 허물 수 있다. 예를 들어, 커뮤니티 센터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건전한 대화를 위한 중립적인 장소를 제공한다. 우리가 서아프리카의 영어 수업에서는 토론을 위해 성경 이야기를 사용하지만, 종교적으로 더 제한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국가에서는 이 방법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디어는 사람들이 준비가 될 때까지 익명으로 사물을 탐색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복음을 접하는 사람들이 더 안전하게 느낄 수 있어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한 문화가 공동체를 구축하는 방법은 상황마다 다르다.[4]
이 전략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듣는 대상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복음의 어느 부분을 나눌지를 서둘러 결정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공동체속에서 편안한 나눔의 기회를 찾는 과정은 몹시 힘들 수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선포와 관계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대답은 둘 다 즉, 미루지 말고 그리고 자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전략은 사람이 믿기 위해서는 믿음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것에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꾸준히 인내하기
타당한 구조를 구축하는 것은 복음 선포와 개종을 위한 안전 장치가 아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속에서는 작업 진행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문화는 우리가 공격적인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찾아나갈 것이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속에서 관용, 존중 및 확언의 빌딩 블록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 댓가를 치르고 다양한 신념을 수용하며 새로운 공동체와 교류하는 것이 왜 유익한지 깨달아야 한다. 그들이 믿는 사람들로 이뤄진 공동체에 참여하고 거기서 행복감을 느낄 때 복음의 자료에 대한 새로운 청사진을 갖거나 복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5]
전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도록 돕기 위해 타당한 구조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런 구조는 이미 수용적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접근 가능한 공동체가 주는 기회를 갖도록 초대할 때 가장 유용할 것이다. 관계 초기에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면 우리는 믿음 대로 살고 복음을 충실히 선포하는 가운데 더 나은 이야기를 소개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미주
- E.D. Burns, The Transcultural Gospel, (Kindle) (Cape Coral: Founders Press, 2021), 23.
- Sam Chan, Evangelism in a Skeptical World (Grand Rapids: Zondervan, 2018), 41.
- David Maranz, Peace is Everything: The World View of Muslim and Traditionalists in the Senegambia (Dallas: 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 2006), 96.
- 편집자 주: 로잔 글로벌 분석 2017년 3월호에 실린 글 참조 바람. ‘The Good News for Honor-Shame Cultures’ by Jayson, 링크 주소: https://lausanne.org/content/lga/2017-03/the-good-news-for-honor-shame-cultures.
- 편집자 주: 로잔 글로벌 분석 2022년 3월호에 실린 글 참조 바람. ‘The Dilemma of Personal Salvation in Collective Cultures’ by I’Ching Thomas, 링크 주소: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3/the-dilemma-of-personal-salvation-in-collective-cult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