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독특하게 제목이 붙은 책 Stuff[1]에서 다니엘 밀러는 사물의 겸손함에 대해 논하며, 물질적 대상이 우리의 의식적인 시야에서 사라지지만 종종 개인과 공동체의 움직임과 선택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과소평가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약식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이 글에서 밀러의 물질적 유물의 겸손함과 구술성(orality) 사이에 유사한 관계가 있다고 제안한다.
오늘날 세계에서 하나님과 함께 선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술성의 개념은 익숙하지만 명확하지 않은 용어로 남아 있다. 분명히 21세기 선교적 소통 전략을 형성하고 다듬는 데 있어 실용적인 범주로 속한 개념은 아니다. 필자는 2022년 여름에 40개 이상의 국가에서 온 선교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문제를 접했다. 나와 나의 공동 구술성 촉진자들이 일부 동료들과 구술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우리는 세 가지 좋은 의미이지만 우려스러운 주제로 요약할 수 있는 패턴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첫째—나는 구술성이 글을 읽을 수 없는 시골 사람들에게 다가가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당신이 그것을 실행하고 있어 기쁘다.
둘째—그것은 내가 목표하고 있는 청중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중요한 글로벌 리더들과 사회적 인플루언서들과 함께 일하라고 부르셨다.
셋째—그런 중요한 사람들과 일하는 촉진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아는가?
물론 아무도 무례하지 않았고 나는 글을 읽을 수 없는 시골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우려했던 것은 많은 선교 지도자들에게 구술성이 하나님께는 중요하지만 오늘날 선교 전략상으로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시골에 거주하는 문맹자들에게 다가가는 단지 실용적인 도구로서 부정적인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았거나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대의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들과 도시의 주요 인물들(gatekeepers) 사이에서는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1~2년 동안 우리는 구술성에 대한 너무 좁은 이해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 글을 발표했다. “Towards a Theology of Orality“와 “The Living Word for Living Languages” 등이 그 예이다. 첫 번째 글은 구술성을 더 넓은 신학적 틀에 두려고 했고, 두 번째 글은 구술성이 전도와 제자 훈련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과 같은 중요한 선교 문제에 대해 전략적 범주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오늘날의 선교 시대에 구술성을 간과하면 큰 위험을 초래할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고 싶은 더 넓은 우려가 남아 있다.
이 글을 통해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전략적 질문(과 질문하는 선교 지도자)이다. 궁극적으로 ‘구술성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구술성을 단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경 참여를 위한 실용적인 도구가 아니라 소통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 재구상(re-image)해야 한다. 또한, 서구의 디지털 구술 소통자들 사이에서 구술화가 지속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재구상이 시작되어야만 오늘날 모든 선교 분야에서 구술성을 통합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2]
구술성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재구성(reframe)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나는 로잔 구술성 촉진자 팀이 로잔 내 9개 다른 이슈 그룹의 다른 촉진자들과 가졌던 일련의 대화를 활용하고자 한다. 어떤 그룹은 교회 개척이나 아동 및 가족과 같이 구술성과 자연스러운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리더십 개발, 사역 모금, 창조세계 돌봄, 비즈니스 선교(BAM)와 같은 네트워크와도 만났다. 우리는 각 중요한 영향 영역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고 구술성과의 상호 연관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경험하고 오늘날 이용 가능한 구원의 완전한 측면을 알도록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찬 강력한 대화였다. 우리의 논의에서 다양한 중요한 주제가 떠올랐지만, 오늘날의 전략적 인플루언서들과 주요 인물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서 구술성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적 주제가 부각되었다.
첫째, 각 네트워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인간의 번영이라는 목표를 공유했다. 둘째, 그러한 번영은 항상 다면적인 방식으로 관계적이며, 셋째, 그 관계를 구축하고 회복하는 것은 항상 중요한 소통 전략을 포함한다. 나는 구술성이 이 모든 범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제안한다.
먼저, 창조세계 돌봄과 모든 국가를 위한 건강과 같은 다양한 네트워크의 대표자들은 죄로 인해 깨어진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샬롬의 성경적 개념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또한, 장애 관련 네트워크는 모든 종류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감소를 극복하도록 돕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표명했다. 심지어 BAM의 네 가지 기본 선(사회적, 환경적, 경제적, 영적)에 대한 논의도 하나님이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을 변혁시키기 원하신다는 깊은 헌신을 가리킨다. 이러한 로잔 네트워크 옹호자들은 성경적 구원이 단지 육체를 떠난 영혼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구원을 포함한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육체적, 영적, 물질적, 심지어 공간적 안녕(wellbeing)에 관여하시기 월하신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네트워크의 사람들에 대한 다면적 관심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예배하도록 하는 관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즉시 두 번째 관찰— 즉 결론을 강조한다. 부차적으로 발생한 결론이다. 그런 번영은 올바른 관계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관계가 깨어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관계를 재창조하고, 하나님, 자신, 다른 사람 또는 창조물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의 본을 보여 주시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진정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오셨다. 중요한 것은, 모든 네트워크가 그들의 문제를 매우 관계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이는 리더십 개발 네트워크에서는 이것이 명확해 보이지만, 창조세계 돌봄 같은 그룹에서는 덜 명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진자 재스민 콴은 “창조세계 돌봄은 모두 관계에 관한 것이다”라고 요약했다. 더욱이, 각 촉진자는 그들의 네트워크가 적어도 하나 이상의 깨어진 관계를 해결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통합은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범주였는데, 특히 통합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많은 네트워크 대표들은 더 넓은 로잔 네트워크 내에서뿐만 아니라 더 넓은 선교 세계에서도 그룹(심지어 로잔 이슈 네트워크)이 한두 가지 관계를 강조하지만 특정 커뮤니티 내에서 깨어진 관계의 전체 범위를 통합적으로 참여시키는 적절한 모델이나 패러다임을 실제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우려를 토로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나치게 단순한 용어를 사용하는 위험이 있지만, 반복할 가치가 있는 세 번째 주제로 넘어간다. 깨어진 관계의 중심에는 실패한 소통이 있다. 그 이유는 광범위하고 복잡하며, 창세기 3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각 네트워크가 그들 각각의 문제와 관련된 소통의 도전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애 관련 네트워크는 인식의 부족이 그들의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소통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을 한탄했다. 사역 모금 네트워크는 문화적 장벽과 고정관념이 그들의 문제에 대한 소통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아동과 가족 네트워크는 아이들과의 관계적 연결을 만드는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그리고 자유와 정의 네트워크는 교육적 맥락에서 오해된 커뮤니케이션 선호도를 보상해야 했던 학생들의 증언을 들려주었다. 따라서 모든 네트워크에 있어서 소통은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각 네트워크는 다른 네트워크보다 더 의도적이거나 발전된 의사소통(communication) 전략을 통해 특정 단절된 관계를 해결 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지만, 각 네트워크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자, 클라이언트, 대상 청중, 미전도 종족 및 그들의 공동 관심 영역 내 다른 파트너들과 잘 소통하지 않으면 그들의 영향력이 아무리 커도 최소화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완전히 무효화될 것임을 직감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결론은 소통이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로잔의 각 이슈 네트워크에 있어 필수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요약하자면, 소통은 올바른 관계를 재구축하는 데 중요하며, 이는 인간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것이 구술성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소통에 대한 논의는 모든 대인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구술성의 고유한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요점은 바로 여기 있다. 디지털이나 문자 형식과 같은 다른 방식들이 포함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것들은 인간에게 외부적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들은 소통을 보존하고 지리적, 시간적 장벽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자와 디지털 매체는 인간에게 외부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의 신흥 AI 기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인간에게 추가될 수 있지만, 구술성은 전 세계적으로 인류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구술적 소통자로 시작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다른 문자와 디지털 영향력도 고려해야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구술성이 모든 인간 소통의 기초라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선교의 리더들이 간과하고 있는 구술성의 겸손함(humility of orality)이다.
구술을 무시하거나 권력과 멀리 떨어진 시골 문맹자에게만 해당되는 고정관념으로 치부하는 것은 단순히 무지하고 교만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인터뷰한 많은 촉진자들은 자신의 특별 이슈와 구전 사이에 중요한 관계가 있음을 직감하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을 위한 건강’의 한 촉진자는 ‘구술 없이는 전인 치료를 실천할 수 없다’고 잘 요약했다. 마찬가지로 장애 관련 네트워크의 대표는 ‘구술과 장애의 관계라는 주제가 나올 때마다 이론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이 복잡해진다’고 선언했다. 구술과 장애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는 더 넓은 로잔 구성원을 위해 몇 가지 전략적 고려사항을 제안한다. 특히 모두가 L4 과정에 참여하고 서울-인천 2024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만큼, 첫째로 네트워크와 영향력 있는 분야에서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소통은 단순히 실용적인 중요성을 넘어 신학적 중요성을 지닌다.[3] 당신의 교회, 조직, 또는 네트워크는 소통에 대한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 둘째, 당신과 네트워크가 하나님을 위해 소통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구술 의존적 소통자로 태어났다.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든, 대학생이든, 신학교 캠퍼스에서든, 거리의 성노동자들 사이에서든,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구술에 의존한다. 우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그 구술 의존도는 우리가 (혹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높다.[4]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싶다면 구술성의 본질과 그 겸손하지만 널리 퍼진 존재에 주목하기 시작해야 한다. 셋째,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격려를 받자. 구술성의 겸손함 덕분에, 우리는 많은 경우에 구술 도구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로도 통합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이야기이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나은 이야기, 특히 하나님의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물론 구술성은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 이상이지만, 서사형 콘텐츠는 구술 소통의 작동 방식인 경우가 많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를 통한 변혁의 힘을 (재)발견했다.[5] 예를 들어, 우리가 인터뷰한 모든 로잔 네트워크는 그들의 네트워크에서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 대부분은 이를 구술성과 관련하여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힘을 직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가 이러한 점을 더 필요로 한다고 추천한다. 종종 잘못된 이야기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과 수치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마음의 언어다.[6]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그의 신실함에 대한 증언을 되새길 때, 우리는 영적 변화를 촉진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따라서 스토리텔링과 같은 구술 지향 도구들은 로잔이 대위임령을 완수하는 데 있어 발생하는 격차를 해소하려는 모든 시도에 있어 중심이 되어야 한다.[7] 구술성을 멀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가장 유망한 방법이 더 나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제안한다.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하고, 노래하고, 공연하자. 진정한 이야기를 갈망하는 세상, 그리고 그보다 더 그 이야기를 지으신 저자(Author)를 위해서.
Endnotes
- Daniel Miller, Stuff. (Cambridge: Polity Press, 2010).
- While not specifically oral-centric, Andy Crouch’s article on shame draws attention to the fact that issues such as orality and shame, while maybe not traditionally considered to be “Western culture” issues, are now, indeed, part of American contemporary sensibilities. See “The Good News About Shame,” Christianity Today, Vol 59, 2 March 2015.
- For more on this, see https://lausanne.org/about/blog/towards-a-theology-of-orality
- For more on the exciting, emerging research on orality quotients among people groups, see https://gomap.pro.
- For a helpful introduction to the power of storytelling to cultivate transformation, see James K.A. Smith’s Imagining the Kingdom. (Grand Rapids: Baker Books, 2013).
- For elaboration on this, see chapter 5 and chapter 6 in James K.A. Smith, Desiring the Kingdom. (Grand Rapids: Baker Books, 2009), 155–214, 215–30.
- See 대위임령 현황 – Lausanne Mo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