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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나 사회 정의를 다루는 기독교 단체의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변혁이라는 단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생들에게 그들의 열망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예멘의 쇠약해진 어린이나 우크라이나, 시리아, 이라크의 황폐한 도시, 난민의 행렬 등의 이미지들과 인종차별과 테러, 잔혹한 갱단의 전쟁, 인신매매, 심각한 빈곤에 대한 이야기들은 너무도 지독해서 어떤 인간의 존엄성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모습들은 세상이 변화하고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매일 일깨워준다.

변혁이란 무엇인가?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단어[1]는 기독교 개발 NGO단체에서 자주 사용하는 어휘이며, USAID와 같은 정부 기관에서도 사용한다. 그러나 형편없는 변화를 약속하거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도록 독려하면서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변혁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도록 독려하면서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주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역이 생명과 영생의 영적 차원에만 초점을 맞추는지, 아니면 오늘날 세상의 빈곤과 사회적 불의를 다루는 것도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2] 우리의 증거가 말과 행동 모두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행동의 정확한 본질이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직면한 빈곤과 악의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간에 인간은 세상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깊은 의식에 기반하여 반응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데 집중한다. 사회 정의에 중점을 두고 지속적이고 계속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즉 빛과 소금이 되라고 부름을 받았다. 소금은 부패를 막고, 빛은 어둠을 이긴다. 신약에서 “선을 행하라”(갈 6:9-10)는 권면은 사도 바울의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어구로서, 시민과 공동체 생활에 재정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격려한 선행은 가난과 사회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3] 그렇다면 변혁의 개념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변혁의 도전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망은 추구할 가치가 있지만, 실상은 변혁이 복잡하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변혁은 세상의 물리적 현실을 직시하고 삶의 질적 향상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변혁은 일련의 활동으로 달성되지도 않는다. 근본적인 가치와 태도를 다루지 않는 프로젝트나 이니셔티브(주도권)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변화가 지속 가능하려면, 삶의 영적 차원에 기반을 두고 있는 태도와 가치, 윤리도 다루어야 한다. 많은 프로젝트가 사람들을 빈곤과 결핍 속에 가두는 사회적, 정치적 장벽을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기독교 구호, 개발 옹호(Christian Relief, Development, and Advocacy, CRDA)의 최근 기사는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변혁으로 이어지는)을 측정하기 위한 증거 기반의 지표를 제안한다. 책임은 매우 중요하며 모든 프로그램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기사에서 제안하는 많은 지표들은 영적인 생명과 사명감이 있는지 분별하기 위한 대리 지표들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망은 추구할 가치가 있지만, 실상은 변혁이 복잡하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수보드 쿠마르(Subodh Kumar)는, “모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Christ-Centered Organizations)의 사명은 개인과 사회의 변혁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확장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4] 여기에서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이해이다. 하나님 나라의 왕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모든 것을 그의 권위 아래 두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1900년대 초 실패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고 세우는 사회 복음 사상과 같지 않은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분께서 우리를 그 나라로 초대하고 계신다.[5]

신학자인 레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변혁이 못일어나게 하는 개인과 사회의 결함 있는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 . . 생존을 위한 필요 이상으로 식욕을 확장시키는 상상력을 선물이자 저주로 받았다. 인간 사회는 인간 생명의 보존과 충족을 위해 제공하는 물질적, 문화적 재화의 평등한 분배라는 문제를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6]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변혁을 하나님 나라 건설과 동일시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샬롬 개념을 변혁의 개념과 동일시한다. 즉, 세상의 변혁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샬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지역사회 개발 프로그램에서 당연히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에 대해 경고한다. 구약은 그 개념을 정치적, 물질적 복지를 포함하여 설명하지만,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다.[7] 신약에서 약속된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과 교제, 그리고 서로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엡 2:13-22).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넘쳐서 다른 이들을 축복할 수 있는 물질적인 축복이 있을 수 있다. 스토트는 샬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그러므로 샬롬은 메시아가 그의 백성에게 가져다주는 축복이다. 새 피조물과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서 나타난다(고후 5:17) . . . 여러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의가 말하자면 세상의 여러 부분으로 ‘넘쳐 흐르는’ 것을 본다. . .[8]

연고 속의 파리

죄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지속 가능한 변화를 약속하게 되면, 그것을 실행하고 지키지 못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빈곤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현재의 논의 중 어느 것도 인간의 죄의 실재, 즉 개인의 마음 속에 있는 죄와 많은 사회적, 법적, 경제적 구조에 내재된 죄를 다루고 있지 않다.[9] 악과 오만, 권력, 탐욕의 형태로 나타나는 죄는 세상의 많은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지속적인 변화나 변혁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곧 악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나타나서 달성된 것을 파괴하고 축소 또는 약화시킨다.

죄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지속 가능한 변화를 약속하게 되면, 그것을 실행하고 지키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공동체의 유력한 인물이나 파벌의 탐욕으로 인해 달성한 것이 훼손될 때 실망하게 된다.

인간의 죄가 이 세상에 깊이 뿌리박힌 현실에서 사회적, 정치적 변혁이 가능할까? 그것은 성경적 개념, 즉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추구하고 성취하도록 부름 받은 것인가?

누구의 변혁인가?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세상을 변혁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쓰여 있지 않다.[10] 그러나 변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우리를 그와 함께 하도록 초대하시기 때문에 유효한 성경적 개념이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과 피조물을 구속하는 과정에 있으며, 창조된 시간이 영원으로 합쳐지면 만물을 변화시키실 것이다. 이 영원의 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갈 6:10),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신실한 청지기(창 1:28)가 되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개발 전문가들이 사회 변화를 계획할 때, 그들의 의식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기능적으로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실은 커뮤니티 개발과 변화를 위한 노력이 인간 중심적이며, 인간은 스스로를 사회 변화의 중심이자 주요 행위자로 간주한다. 초점은 커뮤니티를 동원하고, 커뮤니티 평가 및 프로젝트 설계를 올바르게 수행하고, 참여와 지역 소유권 및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면서 적절하게 구현하는 것에 맞춰진다. 이러한 작업이 효과적으로 수행되면 변혁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변혁이 되지 않으면, 계획이나 프로세스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간과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열방의 흥망성쇠에 관여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이루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실 길을 모색하는 지역사회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주여, 우리가 계획하고 진행하는 일을 축복하소서”라고 기도하기 보다, “주님, 당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며, 우리가 어떻게 참여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공동체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변화에서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변화에서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론 사이더(Ron Sider)가“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한 말은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보여준다.[11] 하나님은 반역하는 세상에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과정에 있으며, 언젠가는 이 땅에서 영광 가운데 다스리실 것이다.

신학자 N.T. 라이트(N.T. Wright)는 변혁을 창조와 심판이라는 쌍둥이 교리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창조의 선함을 거두어라. 그러면 심판 날에 세상은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우리는 실체가 없는 구름 위에 앉아서 실체가 없는 하프를 연주하고 있게 된다. 심판을 없애면, 존재와 역사가 끝없는 순환을 한다고 보는 범신론자 외에는 아무 희망 없이 시끄럽게 돌아가는 세상만 남게 된다. 창조와 심판을 합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얻게 된다. 이것은 무로부터가 아니라 구(ex vetere)에서 창조된 것이요, 무로부터가 아니라 옛 것, 즉 기존의 것에서 창조된 것이다.[12]

흠이 있는 인류와 썩어가는 피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것의 선함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은 안심이 된다. 그는 악을 다루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 구로부터 새로운 창조(ex vetere)를 완성할 것이다. 그는 그의 일에 협력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오늘날 변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는 거의 없다. 현대 선교 역사의 개척자들은 변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 우드베리(Robert Woodberry)의 연구는 서아프리카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민주주의의 시작을 촉진하는 데 미친 영향을 기록하고 있다.[13]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는 인도에서 사티(sati) [14]를 폐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클랩햄 섹트(Clapham Sect)는 대영제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게 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다.

변혁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하나님은 사회를 변혁시키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왕의 실재에 대한 증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서 증거하고 협력하는 방법은 긍휼을 보여주고,[15] 정의를 옹호하며[16], 죄로 가득하고 깨어진 세상에서 구세주를 선포하는 것이다.[17]

 

미주

  1. 신약에서 변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변형(metamorphoo) 인데 다른 형태로 변화하다, 변화되다를 의미하며, 수동태로 그리스도의 변형(transfiguration)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의미는 변화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커뮤니티 개발 프로젝트는 점진적인 변화를 다루며 본질적으로 진정한 변형(transformative)이 아니다. 커뮤니티 개발에서의 변화가 갖는 의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Rupen Das, Compassion and Mission of God: Revealing the Hidden Kingdom (Carlisle: Langham Global Library), 135-163을 참조하라.
  2. For more on this debate and to understand the issues that undergird each position, see Das, Compassion and the Mission of God.
  3. N.T. Wright, Paul for Everyone: Galatians and Thessolonians (London: SPCK, 2002), 79.
  4. Subodh Kumar, ‘Toward Building Evidence of Kingdom Impact,’ Christian Relief, Development, and Advocacy 3, no. 2 (2022): 24–36.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왕국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이 건설하고 계시다.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해야 한다.
  6. Reinhold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 Study of Ethics and Politics (New York, NY: Scribner’s, 1932), 1.
  7. 주변의 많은 왕국들이 고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번영했고 일부는 일정 기간 동안 평화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구약에서는 이 번영을 하나님의 샬롬으로 돌리지 않는다.
  8. John. R. W.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 (Downers Grove, IL: IVP Books, 1975), 31.
  9. The following have written extensively about sin embedded in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structures in society: Walter Wink, Engaging the Powers: Discernment and Resistance in a World of Domination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2);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 Study of Ethics and Politics; Walter Rauschenbausch,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New York, NY: The MacMillan Company, 1917); Jayakumar Christian, God of the Empty-Handed: Poverty, Power and the Kingdom of God (Monrovia, CA: MARC, 1999).
  10. 정의를 구하라는 명령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의 엘리트와 권력자가 정의를 위해 맞서 싸우도록 주신 것이다(미 6:8).
  11. Ron Sider, Lecture, Acadia Divinity College, Acadia University, Wolfville, NS. May 27, 2013.
  12. N.T. Wright, ‘Jesus Is Coming – Plant a Tree!’ Plough, 2015, https://www.plough.com/en/topics/justice/environment/jesus-is-coming-plant-a-tree.
  13. Robert D. Woodberry, ‘The Missionary Roots of Liberal Democracy,’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106, no. 2 (2012): 244–74.
  14. 죽은 남편의 장작더미에 과부를 태우는 관습.
  15. 갈 2:10, 벧전 3:8, 골 3:12, 요일 3:17, 잠 19:17, 22:9, 16, 약 2:14-17
  16. 사 1:17, 미가 6:8, 슥 7:9-10, 잠 14:31, 22:22
  17. 벧전 3:15-16, 시 96:2-4, 마 28:18-20, 롬 1:16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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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펜 다스(Rupen Das)는 캐나다 성서공회의 회장이며 연합성서공회의 집행이사회와 세계평의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그는 토론토(Toronto) 틴데일(Tyndale) 대학의 연구교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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