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는 정부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권위 사이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최근 이 두 권위 사이의 긴장감이 국제적으로나 대인관계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여행, 모임, 그리고 교회가 통제되고 폐쇄되자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으로 ‘내가 순종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 질문은 새로운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 교회 역사, 선조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볼 수 있다.[1]
성경에 나타난 권위
창조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질서를 원하시며 정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다양한 것이 하나 된 삼위일체 안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나님, 이웃, 자연, 그리고 자신과 사랑을 나누며 올바른 관계를 자유롭게 맺어나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형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에 빠지고 삶이 무너질 수 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사회의 건강한 질서는 선물과도 같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는 전 인류와 창조물에 축복이 된다. 의도된 하나님의 질서는, 정복하고 생육하며 번성해야하는 인류의 사명을 뒷받침하며, 힘을 실어준다. 이 패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시는 것처럼, 문화를 돌보고 지켜내는 시민 사회에서 인간이 서로 상대적이지만 결코 서로를 지배하지 않는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창 2:15; 민 6:22-26).
세상과 인간 통치의 권위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권위를 알기에 세상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완전한 평화 속에 거할 수 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 역시 믿는자에게 통치자를 따르라고 권고한다 (롬 13:1; 벧전 2:13-14).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 아래 통치 권위는 우리에게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칙령(대위임령)을 선포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 왕이신 예수님의 충신이 되라는 이 명령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나머지 인류가 현재 다른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충성은 절대적이며,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권세의 통치가 허용된다. 이는 여전히 그 안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걸맞는 비유로, 베이비시터(baby sitter)에게 아이를 맡겨두는 부모를 들 수 있다. 베이비시터는 부모로부터 책임과 권위를 부여받고, 부모들이 돌아올 때 보고를 할 것이다. 부모가 시청을 금지한 영상을 베이비시터가 보라고 권할 때,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긴장감이 도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많은 정부가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대위임령과 같은 그의 명령을 축소하는 법을 제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 정부는 그의 다스림 아래에서만 통치하도록 허락된다면,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뚜렷한 명령에 모순되는 정부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성경적 모델
최대한 간단히 표현해보자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최소한) 네 가지 방법이 있다.[2]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세상 권세에 순종하는 것 사이에 놓여있던 초대교회에서 각각의 방법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 틀을 기반으로 하여, 고민해보면 좋을 만한 선교적 질문들이 생겨난다.
첫 번째 모델은 진리를 선포(declare) 하는 것이다. 이는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평화를 전파하는 전략이다. 베이비시터의 비유를 통해 보자면, 아이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권위자에게 진리를 말하고, 더 큰 권위자(부모)의 바람에 따라 시간을 보내는 더 나은 방법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4장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이것을 볼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금했으나 그들은 공손하게, 하지만 단호히 이를 거절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그 왕국의 복음과 그것이 시민 사회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파하며, 문화, 법, 리더십을 변화시키려는 희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공동의’ 선을 세워나가기 위한 이상으로 향하는 정의로운 사회와 노동을 위한 성경적 비전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는 사도행전 4:29에서 제자들이 기도할 때 보여지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우리의 시대와 장소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정치적 견해를 상대화하는 올바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선포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방법은 불복종(disobey)하는 것이다. 이 또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지만, 소극적인 혹은 비판적인 방향에 가깝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따르며 그의 성품에 맞게 행동하는 시민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악을 폭로하고 불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사도들은 당국의 직접적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된다. 천사가 그들을 풀어줄 때, 그는 종교 지도자들이 말한 것과 상반되는 지령을 전달한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행 5:20). 불복종의 이유에 대해 말할 때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응답한다 (행 5:29).
오늘날, 만남을 가지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인간을 혹사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며 부당한 법을 고의적으로, 기꺼이 어기는 지하교회가 여럿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통제된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과 인간 모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시대와 장소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나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사명을 해나가고 그분께 충실하기 위해 어떠한 정치적 법령에 불복종해야 하는가?
세 번째 방법은 하거나 이탈(desert) 상황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 방식 끝의 수동적/이탈적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부당한 정부 사이의 긴장감으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죄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만약 베이비시터가 폭력적이라면, 아이는 집으로부터 달아나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다(마 10:23).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가 박해받을 당시, 그들은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더 빠르게 전파되었고, 그들에게는 사역할 수 있는 날이 더 주어졌다. (행 8장).
한 러시아 사역 리더의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우크라니아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한 이후 처벌의 두려움으로 인해 나라를 떠났다. 전쟁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은 러시아 법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정부가 하나님께 반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나는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나는 살상과 하나님의 법에 반대하는 결정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의 시대와 장소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나를 압제적인 정권으로부터 이탈하게 하시고 그분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실까?
마지막 전략은 불합(dissonance)하는 것으로, 법에 대해 수동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종에 대해 강요받을 때,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경쟁하는 두 왕국 사이에서 삶이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이며, 계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3] 그렇기에, 여전히 능동적/건설적 방식에 해당한다. 억압하는 베이비시터를 머리속에 그려볼 때, 아이는 잘못된 명령이라 할지라도 집 안 다른 사람의 안위를 위해 따르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만약 집을 떠날 수 없는 어린 동생을 지켜야 하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면 말이다.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도망가지 않고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사로잡힌 채 진정한 유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끈질기게 기도할 수도 있다. 그들이 도망가버리면,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충실한 존재가 될 기회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딤전 2:1-4).
이러한 영역은 한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다른 권위에 순종함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한 회색 영역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몇몇 교회를 통해 볼 수 있다. 이 교회들은 코로나로 인한 규제를 좋게 여기지 않으나, 주변 세상에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기꺼이 법을 준수했다. 어쩌면 정부의 억압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하는 많은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가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특정 이슈들에 대해 입을 열지 않기로 결심했을 수 있다.
불합은 절대 그리스도의 뚜렷한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그리스도의 뜻에 반하는 정책을 촉진시키는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불합은 도덕적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애매한 선택, 혹은 최수의 수단이 아니다. 지혜로운 불합은 계산적이며, 다른 이들의 평안과 번영을 위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죄로 물든 정부와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역설적인 상황 안에서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4]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 우리의 시대와 장소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불합의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른다면 어떤 유익이 있으며, 정부가 길을 잃었을 때 나는 어떻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결론
궁극적으로, 우리는 여러 상황 속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존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어떻게 성령님께 의존하며 주어진 상황을 헤쳐 나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밤중에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달아난다.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활발하게 말씀을 전한다. 결국, 그는 로마에 잡혀가고 만다. 밧모(Patmos) 섬에서 달아날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그는 달아나지 않는다. 로마에서 죽기까지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가택에 연금되어 있는 중에도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말씀을 전한다(행 28:30-31).
복잡한 시대에 어떤 것이 문화적 흐름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까? 사도 베드로는 믿는자들에게 정부의 권위에 순종하라고 명하기에 앞서 이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먼저,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이 우선적으로 천국에 있음을 인지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애착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벧전 2:16).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국적 및 정부에 대한 충성을 혼합해버리면, 혼란의 시대에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을 혼동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도덕적으로 올발라야 한다. 거류민과 나그네인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벧전 2:11). 베드로는 우리에게 순수하고 경건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항상 정부의 법을 따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정부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바른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세상이 우리의 복음과 메시지를 배척할지라도, 언젠가는 우리의 선행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벧전 2:12).
마지막으로, 왜 우리가 부름을 받았는지 기억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리스도와 같이 빛나는 것이다. 우리는 정부의 권위에 할 수 있는 한 순종함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뒷받침할 수 있다. 우리가 우왕좌왕하거나 비이성적이거나 혹은 혼란의 선동자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불복종의 때가 찾아올 때, 세상은 우리의 최후 충성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5]
미주
- A fuller conversation would, in a principled way, bring together wisdom from Scripture, tradition, scholarship, experience, and even the arts, all self-reflectively interpreted and grounded in the ‘norming norm’ of what we believe God has spoken in his word. For a healthy hermeneutic, see John G. Stackhouse, Jr., Need to Know: Vocation As the Heart of Christian Epistem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 The following framework is informed by H. Richard Niebuhr’s Christ and Culture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1), where the options may be understood as quadrants within a grid comprised of two continua: active–passive (alternatively, engage–disengage) on the vertical axis captures whether we lean into or pull away from the conflict; while positive–negative (alternatively, affirm–oppose) is on the horizontal axis and captures whether our stance is primarily upbuilding (maximising shalom) or deconstructing/evading (minimising sin). Rather than being seen as distinctive strategies in a taxonomy outlining all possible responses, it is best seen as a typology or lense through which one may look at any conflict between obedience to Christ and culture. In a complex situation we may adopt aspects of each type at the same time.
- For those Christians called to serve or lobby in politics, dissonance is also necessary. For in a pluralistic democracy, brokering a way forward between competing factions, we must seek what is optimal toward our vision of the kingdom for the flourishing of all (that’s justice), rather than simply being concerned for just us. What is ideal is rarely if ever possible, and only settling for a total win in all-or-nothing policymaking aligned with our values (such as seeking to outlaw abortion altogether and not partnering with those who would make it less likely than it presently is) typically costs meaningful gains in the right direction. Christian minorities must be ‘as wise as serpents and as innocent as doves’ (Matt 10:16). As Otto von Bismarck, first chancellor of the German Empire, observed, ‘Politics is the art of the possible, the attainable —the art of the next best.’
- For a compelling argument to adopt this approach, where principled compromise is a form of Christian realism in a broken world to maximise shalom and minimise sin, see John G. Stackhouse, Jr., Making the Best of It: Following Christ in the Real Worl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 Editor’s Note: See article by Babatomiwa M. Owojaiye, entitled ‘Christian Persecution in Nigeria’ in the May 2022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5/christian-persecution-in-nige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