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Analysis

아프리카 신학을 위한 앤드류 월스의 생애

기독교 역사에서 아프리카의 위치를 다시 중심에 두다

Wanjiru Gitau 11월 2022

2021년 8월 12일 앤드류 F. 월스 교수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많은 추모객이 몰려들었다.[1] 월스 교수는  동료 학자 라민 산네(Lamin Sanneh)와 1992년에 결성한 비공식 학자 그룹인 예일-에딘버러 그룹(Yale-Edinburgh Group)이라는 선교 역사가들의 긴밀한 공동체에서 흡사 수호성인과 같은 존재였다.  비서구권 기독교의 성장이 서구 학계에서 이해되거나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시기에 앤드류 월스 교수는 세계 기독교를 연구 분야로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촉매자의 역할로 콘퍼런스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모아 나중에 출판한 내용이 최근의 기독교 역사에서 핵심 주제를 형성했다.


앤드류 월스 교수는 세계 기독교라는 주제를 연구분야로써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라는 분야

세계 기독교에 대한 그의 지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월스 교수는 매우 겸손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세우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것으로 양보하곤 했다. 세계 기독교는 선교학, 기독교 역사와 함께 비교적 새로운 연구 분야이다. 신학 교육은 성경 연구, 조직 신학, 목회(실천) 신학, 교회사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경향이 있으며, 각각의 하위 학문이 있다. 식민지 시대 직후와 그 이후에도 한 동안, 신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서구 기독교를 분명한 기준으로 삼으며 다른 지역의 기독교는 상황적 신학으로 다루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동의해왔다. 선교운동의 경험에서 비롯된 학문인 선교학은 비서구권에서 기독교를 들여다보는 렌즈가 되었다. 그러나 선교학 그 자체는 선교하는 문화와 수용하는 문화 간의 접촉에서 생기는 문제에 반응하기 위해 등장했다. 세계 기독교가 구체화되기 전에 교회사는 비서구의 기독교를 서구의 선교 활동의 연장으로 취급했으며, 이는 이후 수많은 출판물에서도 그렇게 이례적으로 다루어졌다.

세계 기독교가 현재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처음에는 기독교가 비서구 세계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렸고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한 틀을 잡기 위해 등장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된 주요한 주장은 지난 백년에 걸쳐 기독교가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수적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필립 젠킨스(Philip Jenkins)의 저서인The Next Christendom: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을 통해 대중화했다.[2]젠킨스는 이것을 유럽의 기독교를 연상시키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에 버금가는 혁명적 변혁이라고 선언했다. 미디어 전문가와 인구 통계학자들에게 그것은 미국의 세계 무역 센터에 대한 9/11 공격의 시대정신가운데 눈길을 끄는 아이디어임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월스 교수는 이미 라민 산네, 브라이언 스탠리(Brian Stanley), 다나 로버트(Dana Robert)와 같은 동료 선교 역사가들과 함께 수십 년 동안 그 이야기를 해왔다. 월스 교수의 공헌이 특히 두드러지게 된 것은 그가 기독교 확장 과정에서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출신의 학자인 나로서는 그러한 이유로 더욱 월스 교수님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월스 교수의 아프리카 기독교 세계로의 여정

그는 가르침을 중단하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앤드류 월스에 대한 나의 동경은 개인적인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월스는 마크 쇼(Mark Shaw)와 함께 나이로비에 있는 아프리카 국제 대학에서 선구적인 세계 기독교 박사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핵심 주제에 대해 강의하셨다. 그는 영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잘 훈련된 역사가로서 시에라리온(Sierra Leonne)에서 어떻게 선교사로 섬겼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아프리카 학생들에게 2세기 교회사에 대해 강의했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지역 토착민 교회에서 자신이 기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르침을 중단하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책자, 지역적으로 출판된(흔히 개발되지 않은) 신학 논문, 오순절 교회의 카세트 기록, 주요 교회의 교회 위원회 회의록, 일반 아프리카인의 증언 및 전기, 전례를 위한 소책자 등과 같은 자료들을 세심하게 수집했다. 그는 이 자료들의 내용을 샅샅이 뒤졌고,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기독교에 대한 식민지 이후의 반발에 의해 제기된 정체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신흥 아프리카 신학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월스 교수에게, 아프리카 신학과 아프리카 기독교의 진실성(integrity)은 당시 널리 퍼진 세계적인 해석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의 역동적인 삶의 세계에서 현상학적인 몰입과 함께 역사적인 기독교 정찰(reconnaissance)을 요구했다. 당신이 어떤 것을 본 후에는 본 사실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도 그랬다.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살아 있는 기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열대 아프리카의 새로운 세계에서 2세기의 교회가 부활했고, 그 교회는 전통적 종교의 배경에 반하는 기독교와 처음 만나는 문화들 사이에서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었고, 동시에 식민주의와 근대성에 의해 도입된 ‘진보적’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서구 기독교 중심의 이야기(narrative)에서 벗어나, 아프리카 기독교 역사 재조명하기

기독교 신앙, 번역된 기독교 정경(cannon) 그리고 아프리카의 종교적 유산이 만나는 것은 더 이상 서구의 문화와 아프리카 가치의 만남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프리카의 영혼과 대화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월스 교수가 지배적인 서구 기독교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계 기독교 운동을 설명하는 것을 탈피하도록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이 초기 기독교와 비교적 유사한 아프리카의 종교적 삶과 그 세계와의 만남 덕분이었다.[3] 그는 아프리카인의 견지에서 인류 역사상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기독교 이야기 전체를 탐구했다.  유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신앙, 번역된 기독교 정경(cannon) 그리고 아프리카의 종교적 유산이 만나는 것은 더 이상 서구의 문화와 아프리카 가치의 만남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프리카의 영혼과 대화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통찰을 이해하고 성경이 흑인의 의식을 배양하는 중추적인 텍스트임을 주장했으며, 이는 아프리카 토착 교회(AIC, African Indigenous Church)와 나중에 은사주의와 오순절주의의 성장은 물론, 다양한 형태의 자기 해방을 결집시켰다. 월스가 보기에, AIC는 성경적 정경을 아프리카의 문화속에 스며들게 하여, 후대에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더 완전한 표현을 받을 수 있는 토양을 준비하는 선교적 역할을 했다. 월스는 현대의 기독교 이야기 중 아프리카의 기독교 성장을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발전으로 조명했다. 이것은 이전에는 간과되었지만 가장 역동적인 지역을 주목하는 것으로, 세계 기독교 연구의 핵심이자 초기의 원동력이었지만, 일부 세계 기독교 학파는 이 부분을 놓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사도행전 8장에서 에티오피아 내시와 사도 빌립의 만남이다. 아프리카는 사도행전에서 잠깐 언급될 뿐이지만, 월스는 기독교 역사에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포함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읽어 냈다. 내시는 간다게(Kandake) 여왕이 통치하는 아프리카의 독립왕국의 사신으로서 그리스-로마 세계의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월스가 직설법으로 본 짧은 글이다. 비록 오늘날 세계 정세에서는 아프리카가 동생처럼 작은 존재로 보이지만, 복음의 역사 초기에는 국제 네트워크와 구속사에 삽입되어 있으며, 연구에서 보여주듯이, 기독교 2천년의 후속 역사적 흐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끊어지지 않는 이 연속선은 아프리카 기독교를 선교 이야기의 부속물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 그 자체로 세워준다.

2세기에 이르러 북아프리카 교회는 기독교 문해력(leteracy)의 개척자가 되었다. 6세기까지 기독교는 누비아(Nubian) 왕국의 나일강 유역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콥트 교회와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그들의 지역에 이슬람의 그늘이 드리워졌을 때에도 스스로 버텼다. 끊어지지 않는 이 연속선은 아프리카 기독교를 선교 이야기의 부속물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 그 자체로 세워준다.  이는 19세기와 20세기의 선교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선교사였던 월스는 그의 글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그들이 현대 기독교 성장의 촉매자(catalysts)의 역할을 한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대부분 정확히 촉매자였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야기속에서 서구의 지배적인 이야기의 그늘에 가려 그 진가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

장기간에 걸친 기독교 신앙의 전파와 확장

장기간에 걸친 기독교 신앙의 전파, 확산, 확장에 대한 월스의 견해는 단기적으로 도표화할 수 있는 결과 흔히 몰두하는 우리 세대에게 매우 필요한 관점이다. 예를 들어, 초기의 논란을 대상이 되는 운동 중 하나인 3세기와 4세기 북아프리카의 도나티즘(Donatism)은 성경의 내용을 받아들였지만, 교회 내부의 일에 대한 국가의 간섭에 반대하여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해방 신학자들의 반향으로 보이는 사회 혁명을 개척했다. 그들이 제기한 실제적인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교부들의 신학적 답변을 분명히 하도록 강요했으며, 그 결과 앞으로 수세기 동안 유럽의 반문맹(semi-literate) 영토에 전달될 교리와 신조를 탄생시켰다.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터툴리안 (왼쪽), 성 어거스틴 (오른쪽),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아래)

월스가 ‘조직 신학자’라고 부르는 오리겐(Origen)은 아프리카인이었다. 월스가 현대의 오순절파와 동일시하는 법률가 터툴리안(Tertullian)과 로마법을 공고히 하여 서양 신학의 토대를 마련한 어거스틴(Augustine)은 모두 북아프리카에서 자랐다. 수도원 생활(Monaticism)는 북아프리카의 성 안토니우스(St. Antony)에 의해 개척되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광야로 도피함으로써 방종을 거부했으며, 신학적 신실함을 희생시키면서 기독교가 점점 물질적 위안으로 편안해지는 것에 맞서 효과적으로 도전했다. 기독교가 유럽의 전쟁 부족들에게 넘어갔을 때, 수도원 정신은 철저한 기독교 생활과 학문적 보존을 유지했다.

월스는 또한 중국과 한국 및 태평양 지역과 같이 이전에 무시되었던 (적어도 선교 역사에 있어서) 다른 지역에서 유사한 발전를 주목하고, 서로 비교하며 통찰력을 얻었다. 그는 항상 수업시간에 들고 온 너덜너덜한 낡은 지도와 학생들을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광대한 지역들을 훑어 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비서구 세계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얻은 많은 서양인들이 하지 않는 일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구 독자들을 위한 책을 쓰는데 관심이 있었다. 월스는 자신도 글을 잘 썼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공부하는 길을 열었다.[4] 옥부 칼루(Ogbu Kalu)와 콰메 베디아코(Kwame Bediako)는 멘토로서 월스의 지도를 받은 아프리카 기독교의 두 지도자이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아이디어의 유산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월스 교수는 에딘버러(Edinburgh), 애버딘(Aberdeen), 리버풀(Liverpool), 프린스턴(Princeton), 아크로피-크리스톨러(Akrofi-Christaller) 및 기타 지역에서 교육 및 멘토링 커리큘럼과 선교 연구 센터를 설립하거나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Article

Africa to the Rest

The most Christian continent today grapples with its missional future.


선교에서 어려운 질문을 재구성하기 위한 다극적 경청(Multipolar Listening)

월스의 발자취에는 다양한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사명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이중의, 심지어는 다극적 경청을 통해 이러한 난해한 질문을 재구성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로잔 글로벌 분석(Lausanne Global Analysis)의 독자들은 선교 사역에서 섬기며 긴급한 실제 문제에 몰두하느라, 앤드류 월스가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초기 사역때 했던 것처럼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일종의 다극적 경청에 참여하는 일을 하지 못할수도 있다. 계몽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인식론적 틀에 맞지 않으면 끊임없이 외면당하는 대륙의 경우, 미리 준비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은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로운 어떤 것 속에서 일어나는 살아있는 기적을 놓치게 된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감리교 목사이자 시인인 월스와 같은 성숙한 사람이 필요하다.

현대는 진부함으로 대답할 수 없는 복잡한 질문으로 모든 곳에서 기독교와 직면하고 있다. 월스의 발자취에는 다양한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사명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이중의, 심지어는 다극적 경청을 통해 이러한 난해한 질문을 재구성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복잡한 질문을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관 및 리소스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다. 월스는 자신을 비하하는 반지식주의(anti-intellectualism)에 안주하지 않는 모범을 보였다. 평생 선교사 교육자였던 그는 지역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국내외에서 최고의 지적 미덕을 추구하는 자의식 있는 기독교 학자 세대를 양육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서양의 자원을 활용하여 전반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월스 교수의 제자들은 아프리카 기독교 역사 연구가 번역의 과정에서 길을 잃은 기독교 사상의 주변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더 나은 방향으로, 에큐메니컬한) 기독교 사상의 흐름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왔다. 필사적으로 답을 찾는 세상을 위해 성장하는 세계 기독교 운동에 그와 같은 은인이 더 많이 필요하다.

미주

  1. https://www.christianitytoday.com/news/2021/august/andrew-walls-world-christianity-edinburgh-yale-tributes.html
  2.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3. 편집자 주 : 로잔 글로벌 분석 2018년 9월호 https://lausanne.org 에서 Mons Gunnar Selstø 와 Frank-Ole Thoresen 의 ‘Lessons from North African Church History: Embracing a Theology of Unity in Diversity’라는 제목의 기사 참조, https://lausanne.org/content/lga/2018-09/lessons-from-north-african-church-history.
  4. Walls has numerous articles that can easily be accessed on various online platforms.